[20171105m] 가을편지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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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5m
빌 4:4-7
가을 편지
(빌 4:4-7, 개정)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는 바울이 주후 62년 가을에 자기가 많이 사랑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우리에게는 2000년 전에 띄운 바울의 가을 편지입니다. 바울은 그 인생이 어떠했을까요? 행복했을까요? 불행했을까요? 저는 바울이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자기는 행복하지 않은데 남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는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기뻐했고, 늘 감사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야말로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단 겉으로만 보면 바울처럼 구차하고 딱하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이 왜 그렇게 불쌍하고 불행해 보일까요?
우선 고린도교회와의 관계입니다. 바울이 거기에서 약 18개월간 머물며 전도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교회는 바울에게 많은 아픔을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의 직분은 주님의 직계 제자로서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바울은 12제자 가운데 하나도 아니고, 주님과 동시대인이면서도 주님과 직접 대면한 적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강렬한 빛에 고꾸라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바울은 그때 주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도의 사명을 받았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주님이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이 위장 회심했다는 소문에 대해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사도 자격을 두고 아픔을 주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바울이 편지나 다른 것으로는 괜찮은데 말이 시원치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바울의 외모나 언변에서 사도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없다는 겁니다. 테클라 행전에 바울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테클라는 바울을 헌신적으로 도운 여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외모 모사가 나오는데 별로 좋지 않습니다. 2세기 말경의 바울행전 외경에는 바울의 외모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울은 짤달막하고, 대머리, 다리가 양쪽으로 벌어져 있고, 메부리코에 강한 인상을 주나 언제나 온화했다’ 이런 증언들은 아주 신빙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회화를 보면 바울의 외모는 못 생긴 모습으로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6절입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라이헨슈타인이나 케제만이라는 학자들은 바울을 이해하기를, 당시 바울이 선교하던 지역에서는 신비주의자들의 주술적 웅변술이 성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 사람이 신접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당시 바울은 그렇지 않았기에 예수의 영에 사로잡힌 사도라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자기가 전도해서 세운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나오니 바울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바로 그 고린도교회에서 쓴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치명적인 아픔이 있었습니다. 몸을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바울은 사탄의 사자라고도 했습니다. 원어적인 의미는 사탄의 저주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대체 이것은 어떤 병이었을까요? 두통, 안질, 간질 등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간질이었으면 바울을 찌르는 가시임에 틀림없었을 겁니다. 그게 어떤 병이든 불치의 병이고, 바울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시험에 들 만한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러 차례 간절히 기도해도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들을 뿐이었습니다.
본문 빌립보서를 저는 바울이 62년 가을에 쓴 가을 편지라고 하지만, 원래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서신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쁨이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빌립보서를 가장 평안하고 행복할 때 쓴 편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바울은 사형수로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옥중서신입니다. 그의 처지가 가장 열악할 때 쓴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바울은 언제 끌려 나가 참수 당할지 모를 사형수로 있을 때 좌절이나 연민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합니다. 우리의 감사는 조건반사적, 상대적이고, 본능적인 감사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감사는 그런 게 아닙니다. 자신이 전도한 사람이 배신해도, 몸에 가시 같은 지병이 있어도,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형수 신세라도 여전히 감사하는 불가사의하고 초월적이며 전천후의 기쁨과 감사가 바울의 감사입니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요? 우리도 이런 감사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도 바울처럼 전천후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나의 사랑의 대상이 언제나 나를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4장 19절 이하에서 출산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엄마는 출산의 고통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기억과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엄마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한 모든 희생과 고생이 오히려 기쁨, 감사, 행복인 것입니다. 지금도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 가지로 농사지을 형편이 안 되지만, 그래도 매년 어렵게 농사 지어 도시 사는 자식들에게 싸 보냅니다. 부모님께는 그게 고생이 아닌 겁니다. 어떤 여건, 조건, 환경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까? 주님으로 여러분을 가득 채우고, 성령충만하십시오. 주님으로 충만하면 우리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여건과 상황과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가을 편지를 통해 바울이 권하고 고백한 전천후의 기쁨과 감사가 여러분과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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