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세잔의 사과

요즘 슈퍼마켓 매대에 쌓여있는 사과 때깔이 원색의 단풍만큼이나 곱습니다.

맛도 향도 그만입니다. 


이해인 수녀 시인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 잘 익은 석류를 쪼개 드릴게요 / 좋아한다는 말 대신 / 탄탄한 단감 하나 드리고 / 기도한다는 말 대신 / 탱자의 향기를 드릴게요 ...>(‘10월의 엽서’ 중에서)라고 했지만 저는 빨갛게 익은 사과 하나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용의 <시월의 마지막 밤>도 지나고 어느새 11월, 공교롭게도 오늘(11월 5일)이 바로 111년 전 평생 사과를 그렸던 <사과의 화가> 세잔이 더 이상 사과를 그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지난 10월 22일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다 쓰러진 후 결국 폐렴으로 오늘 아침 숨을 거둔 것입니다. 


미술 비평가이자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의 거장인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1870-1943)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며 이브의 사과와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를 들었습니다.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범한 금단의 사과는 인류의 원죄를 상징하고,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사과는 근대 과학시대의 개막을 의미했으며, 폴 세잔이 평생에 걸쳐 그린 사과는 20세기 현대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드니가 오늘까지 살았었다면 인류 앞에 정보통신의 새 세계를 열어준 <스티브 잡스의 사과> 하나를 더 꼽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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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고향 엑상프로방스를 떠나면서 <나는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과에 대한 그의 집착이 얼마나 유별났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실제 그는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사과의 성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줬고, 세잔의 사과는 이제 현대미술의 상징이 됐습니다. 세잔은 탁자 위 정문을 고정된 한 자리에서만 그리지 않고 여기저기 이동하며 다양한 시각에서 관찰하고 그걸 하나의 화폭에 담았습니다. 단순한 정물인 사과 하나도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겁니다. 이 때문에 그의 사과 그림들은 마치 몇 사람이 각각 다른 방향에서 둘러 앉아 그린 것처럼 뭔가 서로 어긋나 보이고 때로 부자연스런 느낌마저 줍니다. 전통적인 정물화 속에서의 사과가 먹음직스러운 과일이라면 세잔의 그림 속 사과는 그 형태와 색깔을 철저하게 해체하고 분석하여 그린 완전한 오브제입니다. 그래서 세잔의 사과 그림은 매우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대단히 감성적입니다. 사물의 구도에 대한 세잔의 이런 재해석과 실험에 가장 큰 충격과 도전을 받은 사람이 바로 현대미술의 거장인 피카소입니다. 피카소의 큐비즘(입체주의)은 하나의 사물을 다양한 시각에서 분해하고 해체한 후 다시 그 조각들을 재결합하는 기법을 구사합니다. 정면과 측면이 혼재하는 뒤죽박죽의 그림을 그리지만 결국은 그게 기묘한 입체와 균형을 이룹니다. 세잔의 기법을 더욱 철저화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 20세기 회화의 선구자라 칭송하고, 마티스며 피카소 같은 거장들을 다 세잔의 후예들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세잔의 사과가 없었다면 피카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과는 세잔이나 피카소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소중한 과일입니다. 최근 영국의 저명한 식품학자 게리 윌리엄스 교수가 선정해 발표한 건강 장수음식 20가지를 보면 그 첫째가 <사과>입니다. 사과야말로 암과 성인병, 각종 현대병 예방에 가장 좋은 과일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화사한 빛깔의 제철 사과 많이 드시고 모쪼록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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