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4m] 잠잠하라 고요하라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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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4m
막 4:35-41
잠잠하라 고요하라
(막 4:35-41, 개정)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삶에 풍랑도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옳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풍랑이 더 많습니다. 이건 또 왜 그럴까요? 전에는 우리가 세상 풍조에 있었기에 세상이 우리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주님 편이기에 세상이 기회만 있으면 우리를 할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기 전보다 믿은 후에 고난이 더 많은 이유입니다.
본문 35절입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래서 지금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가는 뱃길임에도 풍랑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상식과는 맞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풍랑도 잦아들어야 맞는데 점점 더 그 사태가 악화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믿으면 일던 풍랑도 잔잔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사형통을 기대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기독교도 별 수 없더라는 겁니다.
마가복음 6장에도 풍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45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여기서 말하는 즉시는 오병이어 기적을 베푼 직후에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신 시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습니다. 아직 주님이 행한 초자연적 기적의 감격과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데 다시 시련의 풍랑이 그들을 덮친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해서 늘 기적만 있는 게 아닙니다. 늘 풍성함만 있지 않습니다. 기적이다 싶은데 다시 성난 파도가 밀려옵니다. 현실로 말하면 캄캄한 밤바다에서 역풍을 만나 고통당하는 시련의 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 또한 주님이 명한 뱃길임에도 살인적인 풍랑을 만나는 겁니다.
본문도 그 풍랑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던지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갈릴리 호수는 언제 풍랑을 만날지 알 수 없는 위험한 호수라고 합니다. 호수 북쪽에는 해발 2000미터가 넘는 헐몬산이 있습니다. 그 산에서 만들어진 찬바람이 계곡을 타고 폭포수처럼 갈릴리 호수로 쏟아지면 그 바람이 발작적인 풍랑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 어부들도 긴장하며 조업에 나선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세상살이가 같습니다. 우리도 언제 사경에 처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운 겁니다. 예수를 믿으면 풍랑이 없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오병이어라는 초대형 기적 직후에도 풍랑은 있었고, 주님을 모시고 가던 뱃길임에도 풍랑은 닥칩니다.
그런데 놀랍고도 이상한 것은 제자들은 지금 캄캄한 밤바다 한가운데서 사투를 벌이는데, 주님은 그 시간에 배 고물, 즉 배 뒤쪽에서 세상 모르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고군분투했는데, 나중에서야 주님이 생각나 주님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38절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의 다급한 호소에는 다분히 제자들의 원망이 서려 있습니다.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잠이 오긴 합니까? 라는 뉘앙스입니다. 그제서야 주님이 일어나 일단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를 잠재우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잦아들었습니다. 보십시오. 주무시던 주님을 깨우니까 즉시 상황이 수습됩니다. 종료됩니다. 주님 말씀 한 마디에 광풍이 당장 잔잔해졌습니다. 주님은 자연도, 환경도, 우리 삶의 조건도 다 요리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셨기에 세상 그 무엇도 말씀 한 마디로 통제 가능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주님을 깨우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밤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면 즉각 주님을 깨워서 상황을 반전시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님께 살려달라고 호소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막판에 가서야 겨우 주님을 깨워 상처뿐인 구원을 받습니다.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을 깨웠더라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상황이 너무 긴박했기에 일단 일어나시자마자 풍랑부터 잠재우고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40절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태복음 8장에도 이 사건이 나오는데, 거기서 이 장면은 풍랑보다 제자들을 먼저 책망하십니다.
풍랑을 만나 사투를 벌인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왜 믿음이 없느냐고 나무라십니까? 풍랑과 싸우는 게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깨울 때까지 주무십니다. 우리 앞에 어떤 위기가 닥치든지 주님은 일단 우리가 배고물로 달려가 당신을 깨우기를 기다리십니다. 시편 3편 7절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생애 중 가장 비참할 때 드린 기도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맨발로 궁에서 도망가며 눈물로 드린 기도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주님을 깨우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어느 때고 당신을 깨우기만 하면 즉각 반응하십니다. 주님은 사실 주무시지 않습니다. 너를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냥 주무시는 척할 뿐입니다. 주님은 배 고물에서 다 지켜보신 겁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이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는 걸 다 보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풍랑과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다 보고 계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다윗처럼 즉각 주님께 달려가 호소하기 전에는 안 일어나십니다. 제자들이 처음에는 자기들의 경험과 노력으로 안간힘을 썼지만 통하지 않자 그제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맞다. 이 배에는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시지!
왜 그들은 좀 더 일찍 주님께 구원을 호소하지 않았을까요? 그만큼 주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풍랑 앞에서 두려워할 뿐 신속히 주님을 깨울 생각을 못한 겁니다. 본문 41절입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모시고 가면서도 주님을 몰랐던 겁니다. 그랬기에 주님이 그들의 모습에 안타까워하며 나무라신 겁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배 안에 계십니다. 사나운 물결이 우리를 위협할 때도 주님은 우리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존재가 우리 눈에 잘 안 띄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보다는 높은 파도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모습이 잘 안 보이는 겁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해도 그 파도가 아니라 담대한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체하지 않고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바다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이나 기술로는 안 되고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이 있어야 함을 깨달읍시다. 주님은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지 배 부리는 기술이나 돈 없다고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 항해는 오직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인생 항해에서 풍랑을 만나면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이것이 올해도 석 달 남은 우리 항해에 유일한 성공 비결입니다.
성막의 구조를 보면, 성전 뜰이 있고, 그 안에는 성소가 있고, 거기에는 지성소로 가는 휘장과 그 앞에 향단이 놓여 있습니다. 성소 우측에는 떡상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촛대가 있습니다. 그 등은 우선 정금으로 만듭니다. 7가지로 만드는데, 살구나무 가지를 형상화하여 만듭니다. 그 가지 끝에는 살구꽃 모양의 등잔이 있습니다. 성소에 놓인 등대는 살구나무 가지를 닮고, 그 끝에는 살구꽃을 닮은 등잔이 있습니다. 왜 살구나무 형상이었을까요? 살구를 히브리어로 <샤케드>라고 합니다. 히브리말의 동사 깨우다도 <샤케드>입니다. 성전의 기물은 다 무엇인가를 상징하는데, 등대는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그 등대를 깨우다는 말과 똑같은 살구나무로 만들게 한 겁니다. 성막 안의 등불은 백성들이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샤케드>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깨우는 장치이기도 하고, 백성이 주님을 깨우는 기제가 등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면초가입니다. 우리가 탄 대한민국 호는 엄청난 안보위기의 파고에 직면했습니다. 우리는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사회도 마치 동력이 꺼진 배처럼 이리저리 표류하는 모양새입니다. 교회도 침몰하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각 가정들도 다 밤바다에서 풍랑 만난 형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위기에서는 그 어떤 인간적인 처방이나 노력도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했던 그런 수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을 무조건 <샤케드>, 깨워야 합니다. 파선하기 전에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야 합니다. ‘주여 일어나사 위기에 처한 저희를 구해달라’고 호소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일어나서서 잠잠하라, 고요하라며 풍랑을 제압하고 꾸짖으셔야 지금 이 모든 위기와 위협이 평정되고 수습됩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시자 곧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기도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주님을 깨우는 것만이 나라와 교회가 살 길임을 확신합시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에게는 그런 믿음이나 확신이 없었기에 주님을 찾았으나 늦게 찾아서 꾸지람을 들은 겁니다. 주님이 우리의 최악의 조건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주님을 깨우는 일에 최선을 다 합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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