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3m] 야곱과 이스라엘 (창 25:27-34)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20170903m
창 25:27-34
야곱과 이스라엘
(창 25:27-34, 개정)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야곱과 이스라엘은 어떤 관계입니까? 야곱과 이스라엘은 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지금은 유대인들의 국호지만, 원래는 사람 이름, 곧 야곱의 새 이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야곱에게서 너무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많이 발견한 나머지 자신들을 야곱과 동일시해서 나라 이름을 야곱의 새 이름인 이스라엘로 명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거짓말 장이>, <사기꾼>이란 뜻입니다. 야곱은 허기진 형 에서를 등쳐 장자권을 빼앗고, 나이 많아 눈 먼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복을 가로채고, 외삼촌 라반의 두 딸을 자기 아내로 삼고, 심지어 외삼촌의 짐승마저도 야곱이 차지합니다. 그는 축복보다는 오히려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인물인데, 그보다 더 많은 복을 받은 사람도 드뭅니다.
원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의 하나님이어야 맞습니다. 에서가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서가 아니라 야곱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신 것도 파격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야곱에게 주십니다. 이것은 야곱이 영원한 승자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을 국호로 채용한 것입니다. 개인의 이름이 한 나라의 이름이 되어 오늘까지도 건재합니다. 야곱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4천 년 전의 전설이 아니라 아직도 한 민족으로 나라로 건재합니다. 우리는 다 야곱의 분신입니다. 우리는 다 야곱의 후예입니다. 그러면서 야곱의 새 이름을 국호로 삼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구성이 12지파입니다. 12지파의 시조가 다 야곱의 12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야곱의 직계들입니다. 야곱의 12아들을 원조로 이스라엘의 12계파가 만들어져서 그대로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라 이름도, 민족 공동체의 12원조도 다 야곱입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브라함 이상으로 다윗 이상으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야곱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교활하고 야비하며 인륜 천륜을 다 배반한 야곱이 어떻게 저주를 받지 않고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복을 받을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합니다. 그 비결, 비밀이 무엇입니까?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가장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본문 33절 이하입니다.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야곱이 뒤따라 나오면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와서 야곱이 된 겁니다. 어쨌든 야곱이 동생입니다. 야곱은 운명적으로 장자권과는 인연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숙명에 승복하지 않고 어떻게든 형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으려고 기회를 노렸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야곱이 장자권을 귀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동생이 형의 장자직을 가로챌 생각을 합니까? 부러워하거나 차남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으면 했지 어떻게 장자권을 빼앗으려 합니까? 상상을 초월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곱은 아예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 장자직을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모든 복의 약속이 장자를 통해 계승된다는 사실을 야곱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업을 이을 영적 주자가 장자임을 야곱이 안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직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냥에서 돌아와 허기진 형 에서와 부뚜막에서 맞닥뜨린 야곱은 형에게 팥죽을 팝니다. 야곱이 팥죽으로 형의 장자권과 거래를 시도한 겁니다. 그래서 가장 비싼 죽이 팥죽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목숨을 걸만큼 소중하게 생각한 장자권을 에서는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하며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릴 만큼 하찮게 생각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서를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파격적으로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야곱을 장자직에 앉히셨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이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얼마든지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꿩 잡는 게 매란 말인가? 목적만 달성하면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말인가? 성경을 읽기 위해 남의 등을 훔쳐도 옳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경우는 무엇입니까? 배고픈 형의 약점을 이용해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은 비열하고 악한 짓이지만, 그러면서까지 장자권을 쟁취하겠다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야곱의 무서운 영적인 욕구, 그것은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모든 인간적 한계와 모순을 상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의 잘못을 문제 삼고 탓하고 벌하기보다 그의 목숨을 건 장자권 도박에 감복하여 유례없는 복을 베푸십니다. 에서가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장자권의 소중함을 느끼지도 못했고, 인정하지도 않았기에 동생에게 장자권을 빼앗깁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장자들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올라 신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값진 유업을 이을 상속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장자의 신분을 소중하게 여기고 관리해야 합니다. 이 신분을 가볍게 여겨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면 버림받습니다. 에서는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무슨 장자직이냐 라고 합니다. 팥죽 한 그릇 값에 내 신앙을 팔고, 신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팔아버리면 정말 불행해집니다. 야곱처럼 하나님 자녀인 신분만큼은 지키겠다고 모험을 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지위를 귀하게 여긴 것을 하나님이 높이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잘 지킵시다. 신자의 신분, 하나님 자녀의 지위를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에서의 후예가 되지 맙시다. 야곱의 후예들은 목숨을 걸고 장자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차남이던 야곱을 장자의 지위에 앉히시듯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야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가장 귀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창세기 27장 18절 이하를 보면 야곱이 형 에서처럼 분장하고 눈 먼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권의 축복 기도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 기도로 장자의 복이 대물림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예배 마지막에 축도를 하는 것도 이러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축도는 형식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직을 샀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아버지 이삭의 최후 축복기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그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모험을 합니다. 염소를 잡아 털 많은 형 흉내를 내고, 그 고기로 아버지에게 요리를 해서 가져갑니다. 그러니까 강도짓을 하고 절도짓을 해서라도 하나님의 복 만큼은 내 것으로 삼겠다는 야곱의 투지입니다. 눈 먼 아버지를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해서라도 하나님의 복 만큼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최대의 가치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모든 모순을 상쇄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가치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모험도 희생도 불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저주도 각오해야 합니다. 실제 창세기 27장 12절을 보면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그럼에도 야곱은 이 일을 감행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야곱의 그 믿음을 그의 모든 패륜보다 더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기도생활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을 피해 망명길에 올라 베델에서 노숙합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뵙고 서원기도를 바칩니다. 창세기 32장에 가면 야곱은 귀향길에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기도합니다. 야곱만큼 전투적이고 호전적으로 기도한 사람은 드뭅니다. 야곱의 기도는 무섭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격렬하고 지독했으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두 손을 드셨을까요? 얍복강가의 기도는 역대급입니다. 밤새도록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다가 날이 새려하는데도 야곱이 놓아주지 않자 더는 힘을 못쓰도록 환도뼈를 쳐서 골절시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붙들고 늘어집니다. 축복 안 해주시면 못 간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백기를 드시며 하나님이 새 이름 이스라엘을 주십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렇게 기도해서 하나님을 이겨야 복을 받습니다. 야곱처럼 투쟁적으로 집요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도 기도해서 하나님을 이길 수 있을까요?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체해도 엄한 체해도 날 샐 때가 되면 부모가 백기를 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도 언제나 자녀 된 우리에게 져주십니다. 기도의 계절이 왔습니다. 기도에 무슨 계절이 있겠습니까만, 가을이 기도하기에 최적입니다. 이제 2017년도 몇 달 남지 않았습니다. 더욱 집중해서, 더욱 야곱처럼 집요하게 기도합시다.
야곱이야말로 복 받을 만합니다. 야곱은 절대 가만히 앉아 복이 자기에게 굴러들어오기를 기대하지 않고 저주를 무릅쓰고 움직였습니다. 야곱처럼 목숨을 걸고라도 하나님의 장자직,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지키고, 공격적으로 날 샐 때까지 기도해서 반드시 승리합시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새 이름의 새 인생을 삽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YouTube 시청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