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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11년 6월 26일 주일낮예배<br>본문: 눅 22:36-37<br>제목: 칼을 사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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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p>
<!-- paragraph:p0003 -->
<p><br>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베드로에게 오늘밤 닭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시고 난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칼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 다음 상황을 마태복음에서 찾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이하를 보면, 주님이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는데, 드디어 가룟 유다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종들과 체포조를 이끌고 나타나 이렇게 인사합니다. 49절입니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이 말이 끝나자 곧바로 체포조가 예수를 체포합니다. 졸고 있던 제자들은 혼비백산하는데, 베드로는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리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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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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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여러분은 베드로의 행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폭력입니까, 정당방위입니까? 그야말로 정당방위입니다. 죄 없는 스승이 지금 잡혀가는 판이니 스승을 지키려는 제자의 충정입니다. 달아난 제자들에 비해 얼마나 용감합니까? 무고한 자의 실존적인 저항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뜻밖입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마 26:52).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이 떨어진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최소한의 자기방어도 용납하지 않으신 주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현실에 수용하실 수 있습니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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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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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저는 주님의 이 말씀은 당신의 평소 소신을 끝까지 관철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주님은 누가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내주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평소에 그렇게 사셨는데, 최후의 순간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관철하고 계십니다. 지금 세계는 저마다 칼을 휘두르며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와 보복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그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명하십니다. 너무 비현실적이고 감상적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이 놓쳐서 안 될 게 있습니다. 주님이 어떤 처지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원수가 빼든 칼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배부를 때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닙니다. 신변이 안전할 때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닙니다. 상대가 빼든 칼에 자기의 목을 내대며 하신 말씀입니다. 최소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주님께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을 때야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치열하고 긴박한 처지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은 이래서 우리는 주님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래서 제자들도 달아난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다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죽기까지 홀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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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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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주님이 왜 우리를 향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으며, 우리는 왜 주님 말씀에 순종해서 빼든 칼을 칼집에 꽂아야 합니까? 마태복음 26장 52절 말씀처럼 ‘칼을 쓴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보복은 다시 보복을, 피는 다시 피를, 칼은 다시 칼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중국이나 일본처럼 보복행위를 높이 사는 전통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들이 나서는 상황 같은 것을 영웅시 합니다. 복수심은 판단을 흐리게 하며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보복심은 행위로 나타나면 싸움이나 살인이 되고, 집단화 되면 전쟁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수를 못하게 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고쳐주시고 베드로를 향해 그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곧 정당방위까지 참으라는 겁니다. 원수 갚는 일까지 참으라는 겁니다. 우리는 정당방위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정당방위를 당연한 권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떤 명분의 전쟁도, 피의 보복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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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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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여기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근본적으로 칼을 부정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떻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칼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여호와의 증인들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서 집총(執銃)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차면 군대가 아니라 감옥으로 갑니다. 총 자체를 부정하는 겁니다. 이게 맞는 얘기입니까? 총과 칼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까? 주님은 절대 맹목적인 무저항이나 비폭력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칼을 주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전도하러 보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칼을 하나 품고 나가라는 뜻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입니다. ‘이제 칼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는 겁니다. 겉옷은 개인재산목록 1호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옷이 아니라 재산입니다. 겉옷은 낮에는 옷이지만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전당 잡혀도 해가 지면 도로 내줬다가 아침에 다시 전당을 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칼을 인정하셨습니다. 산 위에 올라와서는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신 분이 조금 전 산 아래에서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칼 자체가 나쁘다고 하신 곳은 없습니다. 주님이 칼을 다시 칼집에 꽂으라는 말씀은 집총 자체를 부정하신 게 아닙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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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원래 칼은 칼집에서 뽑히면 안 됩니다. 칼이 칼집에서 뽑힌 순간 칼이 아니라 살인의 도구, 흉기가 됩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칼입니다. 칼집에 있는 칼이 권위와 정의와 위엄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칼집에서 뽑히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옷을 팔아 칼을 사되 어떤 경우에도 칼을 칼집에서 뽑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기는 사야 합니다. 그 자체가 전쟁 억제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주님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칼의 생리, 칼의 운명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칼은 일단 칼집에서 뽑히면 제 힘으로는 칼집에 곱게 꽂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내 칼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피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을 칼집에 도로 꽂지 못합니다. 언제나 들고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게 칼의 비극의 운명입니다. 겉옷을 팔아서 칼은 사되 칼집에서 절대 뽑지는 말라. 뽑으면 그때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칼의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칼을 가졌으나 칼을 안 뽑는 사람이 진정한 강자입니다. 칼에서 신변의 보장을 찾는 것은 폭력배입니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해도 칼을 뽑지 않으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칼을 뽑는 습성에 젖어 있습니다. 지금도 피 묻은 칼을 빼들고 칼집에 꽂지 못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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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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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칼을 뽑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결국 희생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싫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칼집에 칼을 도로 꽂으라는 것은 수난을 각오하라는 뜻인데, 그게 싫은 겁니다. 하기야 칼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칼을 뽑지 않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을 뽑지 않아야만 부활합니다.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이 칼을 뽑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사는 길입니다. 그 길이 영생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나라의 안보도 궁극적으로 이룩해야 할 남북 간의 화해와 통일도 주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고 결단할 때 가능합니다. 칼에 피를 묻히면 안 됩니다. 그러면 통일은 물 건너갑니다. 겉옷을 팔아 칼을 사서라도 끝까지 그 칼을 뽑지 않고 칼집에 꽂아 두어야지 칼을 휘두르면 화해는 불가능합니다. 오늘은 북한선교주일이고, 어제가 6.25였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깁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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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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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설교보기: <a href="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al6IB3aU6HI$">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al6IB3aU6HI$</a><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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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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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 paragraph:p0019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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