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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70709m] 빗속을 달리라! (왕상 18: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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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20170709m</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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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왕상 18:41-46</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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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빗속을 달리라!</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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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왕상 18:41-46, 개정)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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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오랫동안 가물었는데 며칠 사이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오늘 본문 45절 이하를 보십시오. 엘리야가 쏟아지는 장대비 속을 달리는데, 아합 왕의 마차보다 더 빨리 달립니다.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는 22km입니다. 그 긴 구간을 엘리야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장대비를 맞으며 달렸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그런 겁니다. 무려 3년 반 동안이나 비 한 방울 오지 않던 땅에 자신이 기도해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요즘도 3년 반이나 비 한 방울 오지 않으면 그런 국가적 위기가 없을 겁니다. 요즘도 그러한데 지금으로부터 2800년 전이면 어땠겠습니까. 마차와 사람이 시합을 하면 당연히 마차가 이깁니다. 본문에서는 아합 왕의 마차보다 엘리야가 더 빠릅니다. 46절을 보면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어떻게 기도해서 그런 위대한 응답을 체험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엘리야처럼 장대비 속을 달리는 감격을 맛볼수 있을까요?</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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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그는 우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기도의 가장 큰 특색입니다. 그는 절대 막연하거나 모호하거나 애매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비를 내려 달라, 죽은 아이를 살려 달라, 가루와 기름을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기도는 어정쩡하거나 관념적이거나 범우주적으로 기도하면 응답도 애매모호할 뿐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엘리야는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됩니다. 18장 38절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엘리야는 언제나 자신의 필요를 콕콕 찍어 주문했습니다. 우리처럼 중언부언하거나 횡설수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서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쓸 때가 많습니다. 기도원에 가면 ‘이 민족을 제게 달라’, ‘북한동포를 제게 달라’, ‘중국 땅을 제게 달라’, ‘세계를 제게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준비가 되었다고 그렇게 기도합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됩니다. 그런 황당한 기도를 흉내 내지 마시고 소박하고 적나라하고 원색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제 병을 낫게 해달라, 제게 집을 달라, 제게 필요한 돈을 언제까지 달라, 제가 대학에 가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들으시는 하나님도 헛갈리지 않습니다. 엘리야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습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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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한 사정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구체적으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게 무엇이든 다 알아서 해주시지 않고, 반드시 나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기도하게 하신 후에 응답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먼저 불을 구하게 하신 후에 불을 내리시고, 비를 구하게 하신 후에 비를 내리시고, 돈을 구하게 한 후에 돈을 주시고, 먼저 건강을 구하게 하신 후에 건강을 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다 해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하나님이 알아서 주신 공기와 햇빛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공기나 햇빛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하나님이 그것이 우리에게 필수적이기에 미리 다 주신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기도 없이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면, 우리는 다 그렇게 배은망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먼저 기도하게 하신 후에 베푸십니다. 인간은 사악해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복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지 않고 우연이나 재수, 운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변명하지 못하도록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우리로 하여금 먼저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실 때 반드시 엘리야처럼 조목조목 비와 불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응답도 그렇게 확실하게 내립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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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엘리야는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본문 42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습니다. 유대인의 기도하는 자세는 보통 서서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엘리야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는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박고 기도합니다. 흉내 내지도 못할 자세입니다. 그가 왜 이렇게 기도했을까요? 그가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그는 기도의 달인이요 전설입니다. 그런 사람도 이렇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보십시오. 누가복음 22장 44절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야고보서 5장 17절을 보면 엘리야의 기도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성정이 같다는 말은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기도의 비결이 어디에 있었다고 합니까? 간절함입니다. 간절함이야말로 엘리야의 기도의 최대 강점입니다. 금식이나 철야기도는 하나님을 협박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산 기도가서 소나무를 뽑는 것도 내 처절함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요즘 우리 기도에 간절함이 없습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이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 기도했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땅에 얼굴을 파묻고 기도해도 부족할 것입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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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엘리야의 기도는 확신에 찬 기도였습니다. 41절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이 때는 이미 엘리야가 기도하기도 전입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빗소리를 듣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기도하기 전에 기도 응답을 받은 겁니다. 비도 오기 전에 이미 빗소리를 들은 겁니다. 그만큼 그가 응답에 대한 확신에 차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도자의 중요한 자세입니다. 주님도 너희가 믿고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고 기도하며 의심치 않으면 이 산더러 저 바다에 던지우라고 해도 그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기도의 치명적 한계는 확신보다 회의와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해서 응답이 되면 다행이고, 응답이 안 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패배주의입니다. 확신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종달새 알에서 이미 종달새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이미 빗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확신이 아니라 불신으로 기도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비를 위해 기도하며 이미 빗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확신을 시험해 보시고 응답하십니다. 불신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직도 응답을 받을 태세가 안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응답을 담을 그릇이 준비 안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응답해주셔도 시험에 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실수나 우연으로 기도응답을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미 빗소리를 듣는 자에게 응답하십니다. 이미 받은 줄로 감사하는 자에게 응답하십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디 확신에 차 간절히 기도하셔서 여러분도 엘리야처럼 기쁨과 감격으로 빗속을 달리시기를 기원합니다.</span><span class="Apple-converted-space">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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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 class="Apple-converted-space"><b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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