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18m] 자유 (갈 5:1)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20170618m
갈 5:1
자유
(갈 5:1, 개정)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잘 아시는대로 성경의 주요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자유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본질,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을 말씀하는 대목입니다.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굳건히 자유를 잘 지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을 보면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고, 갈라디아서 4장 31절을 보면 ‘우리는 이제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한 여자의 자녀’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자유니 해방이니 하는 말도 사실 추상적입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라는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그게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고,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를 확실히 밝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자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우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바울 당시 갈라디아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는 율법주의였습니다. 그것은 복음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행해야 구원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세례도 받아야 하지만 할례도 받아야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절 이하입니다.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바울의 통렬한 비판이고 엄중한 책망입니다.
우리는 더는 율법의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거기서 완전히 놓여난 자유인들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십계명, 모세 5경도 지키고, 할례도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야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율법주의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고행과 수도생활을 장려하고, 공덕을 가르치는 사람들, 정성이나 치성을 강조하는 모든 종교들은 율법주의입니다. 선하게 살아야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종교들이 다 율법주의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는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역설이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천당갈 수도 있다는 사람은 상대적인 평가일 뿐이지 천당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 기준을 충족해 천국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덕군자나 우리 개인이나 다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높은 건물이든 낮은 건물이든 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세상에서 이보다 더 명쾌한 말씀이 있을까요? 율법으로 의로워지고 구원 얻을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제 아무리 성자라 하더라도 하나님 눈에는 턱도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여셨다는 메시지가 복음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게 복음입니다. 율법이나 행위, 도덕, 윤리로는 의로워질 수 없지만, 믿음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게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러면 궁금한 게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니까, 율법에서 해방된 자유인이니까 더는 율법이 필요 없습니까? 십계명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은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율법에서 해방된 자유인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결코 율법 무용론자나 율법 폐기론자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주님은 내가 율법을 폐기하러 왔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폐기가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이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율법의 용도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켰다면 이제는 거룩해지기 위해, 성화되기 위해,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 여전히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전에는 법이니까 무조건 율법을 지켜야 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 삶이 경건해집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을 얻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율법이나 행함으로 얻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존중하고 지키면 그만큼 내 삶이 경건해지고 거룩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는 틀렸지만, 이제는 율법이 필요 없다는 무용론이나 폐기론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철저히 자유 하되 율법을 버리지는 맙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더욱 거룩한 모습으로 성화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 1절 이하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이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놀라운 자유의 의미, 해방의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죄를 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하의 거짓말쟁이일 겁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잘 지으며 삽니다. 오죽하면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은 행한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니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랴고 합니다. 바울이 개종 초기에 이렇게 괴로워한 게 아니라 적어도 주후 57년 즈음에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자기 모순과 분열, 갈등이 없으십니까? 내가 죄로부터 자유한 몸이 되었다면 이제 더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삽니다. 이 사실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없으십니까?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합니까? 왜 죄에서 자유했다는 사람들이 계속 죄를 밥 먹듯 짓게 될까요? 이 문제로 가장 재미 본 사람들이 구원파입니다. 구원파에서는 이것을 아직 완전하게 구원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받았다는 구원이 불완전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아직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따라서 완전히 구원받으면 절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완전한 구원을 받기 위해 기성 교회에서 그리로 많은 사람이 넘어갔습니다. 이런 주장이 맞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구원받았다고 죄 안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파에 속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죄를 지으며 삽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옛 삶의 관성, 옛 사람의 습성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더는 마귀의 하수인이 아니지만, 전에 짓던 죄의 탄력 때문에 여전히 죄를 범합니다. 제 버릇 남 주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소속, 지위, 정체성이 달라졌다는 뜻이지 우리의 정서나 기호, 죄에 대한 욕구와 향수, 미련이 해소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좋아합니다. 상상할 수 없이 죄에 대한 친화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애연가가 담배를 끊었는데 사실 아직 끊은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몸에는 여전히 니코틴이 남아 있어서 늘 피울 태세가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죄도 마찬가집니다. 죄는 니코틴이나 마약보다 더 지독합니다. 끊었다고 끊어진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끊임없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며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그들 몸에 남아 있는 잔재 때문에 생긴 일종의 금단현상이지 죄의 종이 되어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법인 성령의 법에 적용 받기에 비록 죄를 짓는다 해도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믿는 자에게 보장된 복입니다. 이것 이상의 복은 없습니다. 피뢰침 아래 있는 자는 벼락을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은 더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살아서가 아니라 다만 피뢰침 아래, 십자가 아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을 적용받는 사람들에게는 더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더는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할 법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죄를 범해도 정죄하고 단죄할 법이 없으면 처벌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생명의 법, 성령의 법에만 적용을 받습니다. 이게 바로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라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복 되고 놀랍습니까?
우리가 자유인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초등학문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 이하입니다.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 당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율법과 죄뿐 아니라 세상 초등학문으로부터도 여전히 자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천박한 초등학문은 당시 희랍 문화권에서 유행하던 점성술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날과 달을 따지고, 절기마다 별자리를 보며 점을 쳤습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아예 이것을 원시종교, 미신이라고 했습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 많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할 건 다 합니다. 자식 결혼 시킬 때 사주도 보고, 정초에는 토정비결도 봅니다. 심지어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까지 꼭 챙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게 미신이 아니라 통계학이라고 변명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천박한 초등학문입니다. 우리는 천박한 원시종교로부터도 완전히 자유하고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당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초등학문에 끌려다니지 맙시다. 손 없는 날 따지지 마시고 차라리 손 있는 날 더 저렴하게 이사하시고, 오늘의 운세 볼 시간에 성경 한 줄 더 읽읍시다. 철학관에 가서 손자 이름 짓지 마십시다. 다 쓸 데 없는 운명철학이고 세상 초등학문이며 원시종교요 미신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그런 것에서 다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째서 그런 데로 돌아가 다시 종노릇하냐며 한탄하는 것입니다. 자유합시다. 믿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지저분하고 비굴한 종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언제나 진정한 자유인으로,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삽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YouTube 시청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