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3m] 일어나 걸으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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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3m
행 3:1-10
일어나 걸으라!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지난주 목요일이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1981년에 우리 정부가 제정한 법정 기념일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이 매년 제정해 지키는 장애인 주일입니다. 오늘은 앉은뱅이로 태어난 성전 앞에서 구걸하며 살던 어느 장애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혼자 걸을 수 없었습니다. 움직이려면 언제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도 사람들이 날마다 성전 문어귀까지 데려다 주어서 거기서 구걸하며 하루하루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선천적인 불행은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그 사람인들 왜 저항의 몸부림이 없었겠습니까? 이제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신의 처지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하루를 굶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이제 사람은 안 보이고 오직 적선하는 동전만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다가 그 장애인을 봅니다. 그들은 그 장애인 앞에 섰습니다. 당연히 그는 적선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동전이 아니라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4절). 하지만 그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고, 다만 무엇을 얻을까만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한 인격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만난 지 오래여서 자신이 사람인지 조차 모르고 사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람은 안 보이고 적선만 보는 게 체질이 된 겁니다. 요즘도 장애인을 비하하는데, 그 옛날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그 앉은뱅이 장애인에게 적선하는 우리 손을 보지 말고, 당신과 마주 선 사람을 보라고 합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실 그들도 한 때는 장애인의 운명처럼 절망과 체념 가운데 주저앉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앉은뱅이 장애인이 두 손 내밀어 하루를 연명하듯이 그들도 갈릴리 호숫가에 손을 내밀어 연명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만나 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웅대한 출발을 시작하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습니다. 그들의 희망이었던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달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허무에 빠져 갈릴리로 돌아가 그물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놀랍게도 거기에 찾아가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발목에 힘을 얻어 걷고 뛰게 된 겁니다. 바로 그들이 성전 문 앞에 앉은 장애인에게 우리를 보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너와 우리가 다를 바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은과 금은 없다고 합니다. 한 푼 적선을 원해서 쳐다보는 그에게 그들은 돈이 없다고 합니다. 놀리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한두 푼 적선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보다는 그 장애인의 근본적인 구원 문제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당시 베드로가 그렇게 외쳤다고 하는데, 얼마나 힘 있게 외쳤을까요? 부활하신 주님 손의 부축을 받고 자신도 걷게 된 체험에서 우러나온 외침이었으니 굉장한 확신에 찬 음성이었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애인이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기적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과 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은이나 금을 구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지만, 나를 얽어매고 있는 온갖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놀라운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을 찾아와 메시아를 기다릴지를 물었을 때, 주님은 당신께서 전하시는 복음으로 인해 맹인이 보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자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도 마찬가집니다. 처음부터 중간까지는 주님의 병고치는 얘기만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역시도 인간의 나약한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해방하는 것이 복음의 참 뜻이라는 상징적 사건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두 푼 적선에 기대하던 낡은 욕망과 절망의 감옥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방되어 예기하지 못했던 새 삶을 시작했다는 것,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현실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숙명론은 약자가 터득한 삶의 지혜가 아닙니다.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이데올로기입니다. 사실 기독교도 여기에 가담해 공범 노릇을 해왔습니다. 죗값이라며 그 자리에 눌러 앉혔습니다. 불교가 말하는 업보도 강자의 지배논리입니다. 사람은 흔히 숙명론을 설득하려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논리를 주장하면서 체념이라는 독을 뿌렸습니다. 오늘날도 사회체제, 권력구조, 경제체제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지금의 상태가 가장 현실적이며 불가항력적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이런 선전에 세뇌된 현대인은 자기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오직 그 현실에 적응하는 게 자신의 살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현대인들도 사실은 앉은뱅이입니다. 제 발로 걷거나 뛰어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날의 현실적인 논리는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두 가지 사실을 과학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하나는 기적은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절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앉은뱅이 장애인이 걸으려는 희망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기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앉은뱅이가 절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현재가 피해를 입습니다. 그래서 앉은뱅이는 남의 손에 이끌려 성전 문에 앉아 구걸하며 사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는 겁니다. 기적이 왜 없습니까? 기적이 없다는 것은 인과율이 말하는 거짓말입니다. 날마다 성전문 앞에 업어다 주는 사람이나 적선했던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조상의 죗값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거기 앉아서 구걸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가 제 발로 자신들과 나란히 성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또 그가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어서 적선한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구원이 그에게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 그 사실을 믿었기에 동전 몇 개를 던져주기보다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쳤던 겁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뛴 것은 기존 질서가 깨진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기득권자들은 기적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복음의 기적은 발생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복음을 접하고도 아직까지도 자신의 삶에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이 문제입니다. 제 힘으로 살지 못하고 남이 업어다 주어 구걸하던 그가 정말 주님의 복음을 만났다면, 본문의 장애인처럼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나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는 여전히 지금도 성전 문턱에 앉아 구걸하는 장애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이 없다는 말은 가혹한 저주입니다. 기적이 없다는 말은 앉은뱅이 장애인은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숙명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기뻐하고 해방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걷고 뛰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기적이 없었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그러면 당시 체제와 야합한 빌라도의 불의가 영원한 진리가 될 뻔 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는 무수한 기적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기적으로 여러분의 육체적이고 영적인 장애가 치유받는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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