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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갈릴리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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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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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02 -->
<p class="p2"><span>복음서 중 맨 처음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은 안식 후 첫 날 새벽 주님의 무덤을 찾아간 몇몇 여인들에게 &lt;그는 살아 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 하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gt;(막 16:6-7)는 천사의 말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자신이 부활하신 곳이요 아직 좌절한 제자들이며 그를 따르던 여인들이 슬픔에 잠긴 채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먼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span></p>
<!-- paragraph:p0003 -->
<p class="p2"><span><b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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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span>예루살렘은 결코 만남의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권모술수의 장소요 거짓이 진리를 누르고 증오가 사랑을 유린하고 죽음이 삶을 조롱하고 거짓과 악한 의지가 득세하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권력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야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주님의 피가 아직 골고다 언덕의 대지를 적신 채 미처 마르지도 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이 억울함과 분노에 가득 차 있던 당시 제자들에게 그 예루살렘 어디에선가 만나자고 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lt;아하, 이제 드디어 복수하나 보다!&gt;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이렇듯 예루살렘은 대결의 장소지 결코 통합의 장소, 화해의 장소는 아니었기 때문에 주님이 굳이 먼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겁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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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span><b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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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span>갈릴리는 주님이 제자들을 처음 만나신 곳입니다. 그래서 오직 사랑과 순종, 평화만이 지배하던 곳이었습니다. 대립, 분열, 싸움 이전의 장소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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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07 -->
<p class="p2"><span>따라서 주님은 그런 첫 사랑의 장소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재회하시길 바라셨던 겁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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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08 -->
<p class="p2"><span>사도행전을 보면 그 후 제자들은 복수를 위해 진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와 헬레니즘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며 갈라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고 화해와 통합의 길로 나아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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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09 -->
<p class="p2"><span>오늘 우리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심각한 대립과 분열과 갈등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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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10 -->
<p class="p2"><span>현실은 온통 괴리와 상반, 부조리와 모순 등의 갈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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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11 -->
<p class="p2"><span>무덤에서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대결의 장소인 예루살렘이나 미움과 갈등 구조 속에서는 결코 주님과 해후할 수 없습니다.</span><span> </span></p>
<!-- paragraph:p0012 -->
<p class="p2"><span><b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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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13 -->
<p class="p2"><span>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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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14 -->
<p class="p2"><span>체념과 좌절 속에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미움 때문에 이웃을 등진 사람들에게, 왠지 주님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시금 첫 사랑의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뵐 수 있는 갈릴리란 대체 어디일까요?</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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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15 -->
<p class="p2"><span>부부에게는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고백한 곳일 테고, 친구지간은 그들의 아름다웠던 옛 우정의 시간들일 것이며 주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진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그 첫 사랑의 기억들이 모두 갈릴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처음 그들위에 성령이 강림했던 자리를 갈릴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이 약해지거나 열정이 식을 때마다 다시금 머리를 맞대고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간구했습니다.</span><span> </span></p>
<!-- paragraph:p0016 -->
<p class="p2"><span><br></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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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17 -->
<p class="p2"><span>그렇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자리, 성령 충만한 공동체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처럼 서로 뜻이 통하고 언어가 통해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과 새롭게 만났던 갈릴리처럼 일치와 화해와 통합이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슨 명제가 주어지든, 누가 앞에 나와 서든 일단 반대부터 하고 부정부터 하고 보는 극심한 불신과 분열증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쳇말로 갈갈이 찢어진 사회, 대체 이 나라가 화합과 화해와 통합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갈릴리는 어디일까요?</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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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18 -->
<p class="p2"><span>제발 이번 조기 대선이 우리를 꼭 갈릴리로 이끌어 모두가 하나 되는 축복의 장이 되길 진심으로 빌어 봅니다.</span><span> </span></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