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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6m] 어찌하여 우느냐? (요 20:11-18)

20170416m

요 20:11-18

어찌하여 우느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부활절을 맞으신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부활의 산 소망이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늘은 원초의 부활 현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 바로 오늘 새벽입니다. 부활절 당일 새벽을 가리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몇 명의 여자들이 주님 시신에 바를 향유를 준비해 무덤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무덤의 돌문이 활짝 열려있고, 주님의 시신도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빈무덤을 향해 울었다고 합니다. 원어적으로는 처절하게 울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볼 때마다 늘 헛갈립니다. 주님의 시신이 없어서 울었다니, 그럼 주님의 시신이 그대로 있었다면 안도하며 기뻐했을까요? 원래는 시신이 그대로 있으면 슬퍼하는 게 맞고, 시신이 없으면 주님이 여러 번 예고하신대로 부활하신 것이기에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없다면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왜 웃느냐고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이 대목을 보면, 천사들이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아쉬움의 표현이고, 거의 책망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주님의 측근들조차도 부활에 대한 관심이나 믿음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보고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근심하며 슬퍼했습니다. 여인들이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자,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합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놀라운 인물이 있습니다. 그것도 구약에 등장하는 부활 신앙의 원조,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을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 어떻게 아비가 100세에 얻은 외아들을 그것도 제 손으로 목을 따서 각을 떠 불태워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수 있습니까? 언어도단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그렇지 일말의 저항도 없이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을 잡겠다며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댑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됩니다. 정신병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만약 창세기 22장만 있고, 신약 히브리서 11장이 없었다면 아직도 아브라함 때문에 날마다 시험에 들었을 겁니다.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엉뚱하게도 히브리서 11장에서 그 의문이 깨끗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히브리서 11장에서 명쾌하게 풀렸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겁니다. 이 때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이어지는 19절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바로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정신 나간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죽은 아들이라도 다시 살려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19절 하반절입니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그 믿음대로 이삭의 부활을 체험한 겁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은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네 아들을 내가 받았다고 하신 겁니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멋진 부활 신앙의 승리입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믿음의 조상이자 부활신앙의 원조입니다. 


부활신앙은 이런 겁니다. 죽음 앞이라도 절대 체념하거나 굴복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외아들을 잡더라도 절대 절망은 없다는 겁니다. 비록 내가 아들을 잡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내 아들을 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바로 부활신앙에 한사코 자기의 목을 내댄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바로 이런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의 반열에 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육신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 믿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영예로운 사실인지 모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처럼 당신의 독생자를 처절한 십자가의 제단에 바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인들 왜 가슴이 미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부활에 대한 전제가 있었기에 기어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 제단에 바친 겁니다. 주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버리신 겁니다. 부활이 있기에 버리신 겁니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입니까? 나사로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 회장장 야이로의 딸처럼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회생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장으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 51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마지막 나팔이란 이 세상 종말에 있을 주님의 재림의 나팔입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이 세상 종말의 나팔, 주님 재림의 나팔이 울리는 순간 우리가 다 오늘 새벽 부활하신 주님처럼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살아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변화된다는 게 중요합니다. 부활은 변화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면서 변화되고, 그때 아직 산 사람은 산 채로 변화되는 사건이 부활입니다.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5장 52절 이하입니다.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두 번 다시 썩거나 죽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가 부활하면 지금 이런 몸이 아닙니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부활체로 변화되는 겁니다. 지금의 몸으로는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부활한 이후에는 우리는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곤충이 허물을 벗듯이 지금 몸이 변화되는 겁니다. 영원히 입고 있을 부활체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부활하면 지금 이 몸과는 다른 신령한 부활체로 변화된다는 것, 그래서 그때는 누구도 신체적 콤플렉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때는 장애인으로 죽어도 장애인으로 부활하는 게 아니라 장애가 완전히 해소된 신령한 몸, 가장 이상적인 몸으로 변화됩니다.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변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5절 이하에서 꽃씨와 꽃으로 비유했습니다. 꽃꽈 꽃씨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씨와 그 여리고 아름다운 꽃이 어떻게 비교될 수 있습니까? 작고 볼품없는 씨가 땅에 묻혀 썩으면 거기서 싹이 나고 꽃이 펴 상상할 수 없는 몸으로 변하듯이 부활이란 그런 것이라는 겁니다. 애벌레와 나비를 비교해 보십시오. 굼벵이와 매미를 비교해 보십시오. 달걀과 노란 병아리를 비교해 보십시오. 얼마나 획기적이고 놀라운 변화입니까? 부활은 그렇게 우리의 몸을, 우리의 존재를 새롭고 온전하고 신성하게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4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빌립보서 3장 21절도 보십시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부활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관계도 새롭게 합니다. 주님은 부활 때는 장가나 시집도 안 가고 하늘의 천사들처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인간적인 갈등이나 모순이 없는 가장 완전하고 건강하고 이상적인 관계로 변화됩니다. 부활해서까지 지금의 남편, 지금의 아내와 같이 살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의식의 연속성이 있어서 내 남편, 내 아내였다는 사실은 압니다만, 그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우리가 형제자매가 됩니다. 여러 해 전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화요일마다 평신도 조직신학 강좌를 열었는데, 부활을 설명하는 시간에 어떤 분이 이것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제 처였습니다. 


부활 때는 우리 몸과 인간관계뿐 아니라 환경도 변합니다. 이사야 11장을 보면 그 때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괜찮습니다. 모든 게 완전하고 전혀 새롭게 변화됩니다. 부활의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삽니다. 사람뿐 아니라 이 자연도 우주도 한꺼번에 부활합니다. 그 영원한 부활 세계에서 영생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소망이요, 역사와 우주의 절대적인 비전입니다. 


그러면 오늘 새벽에 발생한 주님의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왜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반기고 진심으로 축하합니까? 주님의 부활이 앞으로 우리에게 발생할 부활의 보증이요 담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음 타자로 부활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앞에 부활의 물고를 트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부활세계를 개막하셨다는 겁니다. 시간문제일 뿐이지 우리도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을 주님은 당신의 부활로 확증하시고 검증하시고 보장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활을 확신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으면 그 자체로 허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은 고통일 뿐이고 비극일 뿐이기에 부활이 없다면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 앞에서 운 것도 부활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실제로 부활하셔서 그녀에게 왜 우느냐고 하십니다. 내가 부활했는데 왜 우느냐는 것입니다. 더는 죽음 앞에 절망하거나 허무를 노래하지 마십시다. 오늘 새벽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내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16절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부디 나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생생히 들으시고,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을 닦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 당부하신대로 주님의 부활소식을 전하며 사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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