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09m] 배신의 아이콘 (마 26: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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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m
마 26:14-25
배신의 아이콘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오랜 기독교 문화 탓에 유럽 사람들은 보통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작명합니다. 그런데 유다라는 이름은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독일 같은 경우는 심지어 법으로 금합니다. 나의 투쟁(Mein Kampf)이라는 히틀러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유다와 유대인을 동일시하면서 유대인들이야말로 인류의 메시아를 살해한 패륜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정작 유대인들은 지금도 유다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합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좋은 이름입니다. 우선 그 뜻이 좋습니다.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민족명은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서 나왔습니다. 유다 지파가 가장 큰 지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될 때도 북왕국은 국호를 이스라엘로, 남왕국은 유다라고 했습니다. 남왕국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분열한 겁니다. 유다 지파로부터 유대인이라는 민족명이 나온 겁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 이후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유다라는 이름이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배신의 대명사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유다 이름 앞에 붙은 가룟은 출신지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가룟 출신 유다라는 뜻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이 흔했기에 이름 앞에 고향을 붙여 특정한 겁니다.
주님은 어째서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을까요? 주님은 결국 가룟 유다가 자기를 배신할 줄 아셨을 것 아닙니까? 이것은 정말 수수께끼입니다. 사실 그래서 일찍부터 가룟 유다에 대한 변명이나 희안한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것 가운데 하나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다복음>입니다. 이것은 탄소동위원소 측정으로 연대를 확인해본 결과 주후 220-340년에 기록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매우 이른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위경입니다. 즉 정경을 흉내 낸 가까 문서라는 뜻입니다. 유다복음의 내용은 주님이 가룟 유다의 배신 덕분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었기에, 그는 주님의 구속사역을 도운 위대한 사도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에게 배신의 책임보다는 적극적인 해석을 해서 그의 명예를 복권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황당한 사실 왜곡입니다. 그가 정말 주님의 구속사역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면, 왜 주님이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하셨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가룟 유다의 배신이 개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싸늘한 배신의 키스가 주님 구속사역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배신 없이도 얼마든지 인류를 구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를 미화하는 그 어떤 해석도 성서적일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 어설픈 연민이나 문학적 상상력보다 주님의 평가가 더욱 냉정합니다.
유다복음 말고 정경이 말씀하는 가룟 유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개인 신상뿐 아니라 어떤 경로로 주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왜 그가 주님을 배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열두 제자 가운데서 최소한 두 사람 정도는 있었다고 파악하는 젤롯당(열혈당)에 속한 사람으로 봅니다. 열혈당은 호전적인 극우파 민족주의 집단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그 기대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주님을 따랐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정치적 메시아관은 정치적 메시아였지, 결코 고난의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를 몰아내고 왕이 되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를 두고 제자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심지어는 제자의 어머니가 찾아와 청탁까지 합니다. 그런데 막상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보니 주님이 거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만 딴소리만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절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12절도 보십시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주님은 봉기나 거사가 아니라 자꾸만 죽는다고만 하신 겁니다. 여기서 가룟 유다는 배신감을 느낀 겁니다. 한마디로 속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길로 그는 제사장을 찾아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15절 이하입니다.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주님에 대한 실망과 좌절과 분노를 그런 식으로 보복한 겁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3년간이나 따라다니며 그분의 인격과 삶을 배운 제자가 자기 스승을 팔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그의 인간성을 의심합니다. 그는 우선 양심이 불량했습니다. 본문 20절 이하가 최후만찬 장면인데 보십시오. 주님이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판다고 할 때, 제자들이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얼른 떡 그릇에 손을 넣습니다. 떡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그 난처한 순간을 모면하려고 한 겁니다. 주님이 그의 속셈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나와 그릇에 손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잽싸게 손을 빼며 능청스럽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그런데 이때는 이미 그가 제사장을 찾아가 주님의 몸값으로 은 30을 받은 이후입니다. 즉 그 자리에서 가룟 유다는 은 30을 만지작 거리며 <저는 아니지요?>라고 한 겁니다.
그는 돈을 너무 밝혔습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 이하를 보면 한 여인이 주님께 와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향유를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왜 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며 꾸짖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않느냐며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가난한 자를 생각했다기보다는 그가 도적이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회계를 담당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맡으며 돈을 빼냈습니다. 사실 제가 가운데 세리 출신도 있습니다. 마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가 회계를 본 것은 그가 신뢰할 만했다는 뜻인데, 그만큼 그는 이중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팔 사람이 바로 그다라고 했을지라도 제자 가운데 누구도 그가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본 겁니다. 목사에게도 사실 돈이 문제입니다. 몇 해 전에 대구에서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 900만원을 길거리에 뿌렸습니다. 그때 거기 제가 있었으면 제가 제일 많이 주웠을 겁니다. 목사가 목회하며 이런 일 저런 일을 꾹 참는 것은 사실은 생활비 때문입니다. 목사가 돈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너머서 아예 돈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망합니다. 숱한 목사들이 돈 때문에 망하고 맙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어떻게 3년이나 동고동락하던 스승을 은 30에 팝니까? 은 30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입니다. 그런데 향유를 부은 여인은 가룟 유다가 스승을 판 금액의 열 배의 금액을 들여 향유를 예수님께 붓습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가 길길이 뛴 겁니다.
제자라고 할지라도 죄 안 짓고 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회개는 필수입니다. 가룟 유다는 여기서 미숙했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얼마든지 새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사죄의 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실수나 배신으로 따지자면 베드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는 베드로는 즉각 회개했는데, 가룟 유다는 마지막까지 시침을 떼고 거짓으로 살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가룟 유다가 어떤 일을 벌일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그를 콕 찍어 지적할 때도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를 보십시오. 저 멀리서 닭소리가 들리니까 그 순간 주님 말씀이 생각나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고도 회개했는데, 가룟 유다는 주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가 마지막에 가서 뉘우치며 은 30을 도로 갖다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는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자살로 마감합니다. 회개는 뉘우침만이 아니라 삶의 역전입니다.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면 후회하며 가슴만 칠 게 아니라 유턴해야 합니다. 뉘우친다고 돼지 우리에 앉아 아무리 가슴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곧장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뉘우친다며 자살하고 맙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보면, 지옥 맨 밑층에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살았던 12 사도 가운데 하나가 가장 비극적인 배신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가 지옥 맨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가룟 유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엄숙하고 진지한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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