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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70226m]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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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20170226m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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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마 18:21-35</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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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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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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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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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본문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주님의 용서에 관한 교훈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주님 당시의 유대 사회의 용서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우선 바리새인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게 잘못한 사람에 대해 두 번까지는 용서하라고 하지만, 그 이상의 용서는 비굴한 짓이니까 두 번까지만 용서하라는 교훈이었습니다. 다음은 유대 랍비들의 기준인데, 그들은 좀 더 관대했습니다. 그들은 세 번까지는 용서하지만 네 번은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이상은 용서 받는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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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그런데 본문을 보면 21절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할까요? 라며 기준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나 랍비들과 달리 적어도 일곱 번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질문자를 머쓱하게 할 만큼 극단적입니다. 주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대답이 490번까지는 용서하고, 그 이후부터는 용서치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만수요 완전수인 7을 70번이나 반복한 것은 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끝없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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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그러면 주님은 무슨 근거와 명분으로 무한정으로 극단적이고도 비현실적으로 용서하라고 하셨을까요? 주님의 비유가 그 대답입니다. 용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과연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가 왜 주님의 이 말씀을 황당하다며 외면하거나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되는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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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어떤 나라의 왕이 나라 살림을 맡은 고위 관료를 감사하다가 어느 관리가 국고를 무려 만 달란트나 해먹은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로마의 화페 은화 1데나리온은 은 약 4그램입니다. 1데나리온이면 군인이나 품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달란트는 은이 아니라 금화입니다. 지역마다 편차가 있지만 1한달란트는 금 40kg입니다. 1달란트를 데나리온으로 환산하면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사람이 6000일 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이 1달란트입니다. 본문의 이 종은 주인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천문학적 금액입니다. 이 고위 관료가 자그마치 16만 년을 일해서 꼬박 모아야 조달할 수 있는 돈이 1만 달란트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가 식민지 팔레스틴에서 피를 짜듯 유대인들에게 수탈해 간 연간 세액이 800달란트였습니다. 1만 달란트면 이 연간 세액보다 10배가 넘습니다. 그러니까 1만 달란트는 국민경제가 휘청거릴 만큼 엄청난 금액입니다. 당장 주인은 노발대발하며 너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하면서 구속합니다. 그러자 그 종이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합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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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특별한 사유도 없이 27절을 보면 주인은 그 종이 그저 불쌍해서 그 천문학적인 돈을 다 탕감해주고 석방합니다. 이것이 주인이 그 종을 사면한 이유입니다. 자기의 소유, 가족까지도 다 팔아도 갚지 못할 금액의 돈이었는데, 그것을 다 탕감해 준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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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그런데 그 다음 장면을 보십시오. 28절 이하입니다.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며 그를 옥에 가둡니다. 나랏돈 1만 달란트를 해먹은 관료가 왕의 자비로 모든 빚을 탕감 받고 극적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자기가 탕감 받은 만 달란트에 비하면 백 데나리온은 돈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동료가 조금만 참아달라고 호소하는데도 그는 기어이 그를 감옥에 처넣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주위 사람들이 왕에게 그 사실을 그대로 고합니다. 그 비정한 관료는 다시 주인 앞에 끌려옵니다. 32절 이하입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얼마나 지당한 말씀이고, 온당한 처분입니까! 어떻게 만 달란트의 빚을 몽땅 탕감 받은 사람이 돌아 서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그를 감옥에 처넣을 수 있습니까?</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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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그러므로 이 본문을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부터 이런 천하의 못난 인간이 있느냐며 욕하게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종은 대체 누구일까요? 이 비정하고 철면피한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누구입니까? 주님은 이 사람이 바로 다른 이가 아닌 우리라고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고, 내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쥐고 흔들다가 감옥에 처넣은 악한 사람이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주님의 비유가 틀렸습니까? 이 비유는 실화가 아니라 주님의 창작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만 달란트나 빚진 종을 설정하신 이유가 과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필요 이상으로 빚의 규모를 부풀리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죗값은 비현실적일 만큼 천문학적 금액이었습니다. 우리 죄의 값을 매기면 만 달란트 이상입니다. 16만 년간 일해도 다 갚지 못할 금액이 우리 죗값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처음으로 우리 죗값을 돈으로 환산해 처음으로 제시하신 사례입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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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우리는 만 달란트나 되는 갚지 못할 죄를 범한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무조건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배은망덕의 반대말은 보원이덕입니다.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면 원수를 덕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이 보실 때 현실은 그렇지 않더란 것입니다. 다 배은망덕이더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더라는 것이지요. 자기는 100억의 빚을 탕감 받았는데, 자기에게 100만 원 빚진 이웃을 전혀 용서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리얼합니까! 100억 탕감 받고 100만원 빚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흔든 이 비정한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을 대비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죗값이 얼마나 크고,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지은 죄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는 뜻입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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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본문을 보면 &lt;동료&gt;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우리는 남보다 하나도 더 나을 것 없는 동급입니다. 하나님 면전에서는 누구도 잘 난 사람은 없도 모두가 동료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남을 정죄하고 멱살잡이하고, 같은 주제에 누가 누구를 옥에 가둔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는 33절의 말씀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까? 주님의 설정 자체가 지나치게 극단적이라구요? 그렇다면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하십시오. 손톱만큼의 과장 없이 주님이 우리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나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용서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멱살을 잡고 옥에 처넣은 장본인들입니다.</span><span>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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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span>우리는 도무지 남에 대해서는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는 남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면 그것은 내 안에 치명적인 독을 품고 사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게 결국 내게 병이 된다고 합니다. 나치의 피해자 가운데 후에 그들을 용서한 사람들은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끝내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정신적이거나 육체적 병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늘 외는 주기도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lt;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gt; 우리가 언제 우리에게 범죄한 사람을 용서한 적이 있습니까?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는 이것이 안 됩니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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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26 -->
<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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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paragraph:p0027 -->
<p class="p1"><span>본문의 악한 종을 보십시오.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 받았지만 동료를 옥에 처넣은 그의 최후를 보십시오. 34절입니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옥졸의 원문의 뜻은 고문하는 자입니다. 이제 그는 평생 고문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게 남을 용서할 줄 몰랐던 악한 종의 말로입니다. 주님의 비유가 이제 끝납니다.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부디 용서하며 사십시오. 우리는 누구를 용서하고 아무리 많은 빚을 탕감해 준다 해도 절대 억울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을 빚이 아무리 많아도 100데나리온일 뿐입니다.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을 늘 생각하시며 용서하며 삽시다.</span></p>
<!-- paragraph:p0028 -->
<p class="p1"><br></p>
<!-- paragraph:p0029 -->
<p class="p1"><br></p>
<!-- paragraph:p0030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ttabnKFMps0"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