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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20161113n</span></div>

<!-- paragraph:p0002 -->
<div><span>벧전 1:3-9</span></div>

<!-- paragraph:p0003 -->
<div><span>불 같은 시련</span></div>

<!-- paragraph:p0004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5 -->
<div><span>[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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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7 -->
<div><span>여러분 우리는 울며 태어났습니다. 웃으며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울며 태어나 시련 가운데 울며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시련처럼 공평한 것은 없습니다. 시련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시련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신자냐 불신자냐도 가리지 않습니다. 신자라고 해서 시련을 당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신자가 당하는 시련이 더 가볍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시련을 어떻게 해석하고 소화하고 수용하는가만 다를 뿐입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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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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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주후 64년은 2000년 기독교사의 비극의 해입니다. 그해 로마 대화재가 있었습니다. 로마가 다 불탔습니다. 그게 정확히 64년 7월 19일이었습니다. 방화범은 네로 황제였습니다. 새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야망에 가득 찬 네로는 로마에 불을 지른 겁니다. 로마 시민들은 방화범이 황제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궁중으로 몰려와 데모를 했습니다. 성난 군중들 앞에 나선 네로가 자기는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겁니다. 이때부터 로마 당국의 광기 어린 박해가 시작됩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네로 황제에게 순교당합니다.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바울은 목 베임을 당합니다. 네로가 퇴위한 뒤에서 박해는 지속되었습니다. 주후 300년이 넘도록 박해가 이어집니다. 세상에서 기독교가 박멸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 해방령이 내려집니다. 밀라노 칙령입니다. 그 칙령이 발표되자 지난 250년 간 땅 속에 있던 기독교가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카타콤 시대를 마감한 겁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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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1 -->
<div><span>베드로서는 박해 직전인 63년 경에 씌어졌습니다. 베드로의 순교 시기가 64년 말이라고 한다면, 순교 당하기 1년 전에 쓴 편지입니다. 아마 이러한 추측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코 앞에 닥친 대 박해를 예감하며 그 불 같은 시련을 잘 견뎌내도록 격려하기 위해 쓴 편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제가 고난입니다. </span></div>

<!-- paragraph:p0012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3 -->
<div><span>시련이 왜 있을까요? 예수를 잘 믿으면 오던 시련도 달아나야 할텐데, 그게 바로 우리의 기대인데,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혹독합니다. 시련이 대체 뭘까요? 본문 7절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확실함이 원래는 시련입니다. 개역 성경은 믿음의 확실함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게 직역입니다. </span></div>

<!-- paragraph:p0014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5 -->
<div><span>시련은 원래 광산에서 쓰던 용어였습니다. 불순물이 섞인 금을 정련할 때, 순도를 높이기 위해 제련하는 과정을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금광에서 노다지를 캐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막장에서 금맥을 따라가다가 순금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게 노다지입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금이 함유된 금광석을 채취해, 파쇠한 후 물에 넣으면 금이 함유된 무거운 돌만 가라 앉습니다. 그걸 여러번 반복해 정제합니다. 그래도 고운 모래처럼 보일 뿐 금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금을 추출하려면 도가니에 넣고 태웁니다. 그러면 돌가루는 다 타버리고 노란 금만 남습니다. 온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더 높은 순도의 정금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과정을 시련이라고 합니다. 까만 돌가루를 혹독한 풀무불에 넣고 풀무질해서 불순물을 태우는 것이 시련입니다. 그러므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 겪을수록 순도는 높아집니다. 18K와 24K가 우리 눈에도 차이가 나 보이지 않습니까? 순금은 불순물이 제거 돼 아주 노랗게 보입니다. 요즘은 측정기가 발달해 광선을 쏘면 순금 정도가 나오지만, 전에는 까만 돌에 갈아 봐서 전문가가 평가했습니다. 18K도 24K가 될 수 있습니다. 정련 과정만 거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정련 과정을 피하면 18K로 남을 뿐입니다. </span></div>

<!-- paragraph:p0016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7 -->
<div><span>시련 없는 정금은 없습니다. 시련이 금의 순도를 결정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순금처럼 정제하고 정련하기 위해서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은 타지 않습니다. 불순물은 타 버리지만 금은 남습니다. 저의 부친이 이것을 하셨기에 저는 그 과정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처절한 풀무불 시련을 겪었던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3장 10절입니다. “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신자에게 닥치는 시련의 비밀을 깨달읍시다. 시련을 통해 우리의 영성이 더욱 투명해지기를 바랍니다. 욥과 같은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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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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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찬송해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련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에서 일단 찬송부터 하고 시작합니다. 우리는 시련 당할 때 찬송해야 합니다. 제가 자주 드는 예 가운데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사건이 있습니다. 전도하다가 풍속 사범으로 몰려 매질 당하고 깊은 감옥에 갇힙니다. 맞아 터지 상처도 아픈데, 얼마나 절망스러웠겠습니까? 주님이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숨과 원망보다는 그 어두운 지하 감방에서 아픔과 고통 가운데 찬송합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납니다.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그들을 죽도록 고문하던 옥사장이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습니다. 그 옥사장의 집이 빌립보 교회가 됩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반전입니까? 졸지에 지하 감방에 갇혔다고, 어둔 심연에 추락했다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다고, 맞은 상처가 쓰리고 아프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깊은 그 곳 어둠 속에서도 찬송하십시오. 틀림 없이 지진이 일어납니다. 손발을 묶은 것들이 다 풀립니다. 6절을 보십시오.“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8절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시련 가운데 고백하는 사랑이 진짜입니다. 시련 중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참 기쁨과 감사입니다. 평안할 때는 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시련 가운데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시련 당할 때 감사하는 역설에 신자의 신앙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 이하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주님도 너희가 환난을 당할 때는 복이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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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1 -->
<div><span>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시련 가운데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고난의 의미, 신비, 비밀을 압니다. 불행이 불행이 아니고, 저주가 저주가 아니고, 오히려 복이요 은혜임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든지 시련 가운데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연단이란 말도 나옵니다. 7절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연단은 대장장이가 쇳덩이를 달구어 망치질 한 후 찬 물에 식힙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걸 연단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면 전혀 쓸모 없던 쇳덩이가 칼이 되고 농기구가 됩니다. 녹슨 쇳덩이는 반드시 연단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훌륭한 연장으로 거듭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시련이라는 연단과정이 없으면 주님이 쓰시는 합당한 인격으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풀무불을 통과하면 할수록 불순물이 제거되듯이 우리의 영성도 연단의 담금질을 통해 맑고 투명해집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긍정하기에 시련을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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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3 -->
<div><span>우리는 지금 성가대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가대는 어떻게 보면 우리 교회의 시범조입니다. 성가대가 기뻐하고 감사하면 그 시범조의 모습을 보고 우리 모두가 큰 감동을 받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시범조인 성가대가 항상 찬송하면 그 찬송을 듣는 이들이 힘을 얻고 용기를 얻습니다. 현재도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성가대가 시범조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성가대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는 기쁨이 되고, 여러 성도 앞에서는 시범조입니다. 이것이 성가대의 소명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잘 감당하는 성가대가 되시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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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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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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