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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61113m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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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20161113m</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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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span></div>

<!-- paragraph:p0003 -->
<div><span>눅 10:29-37</span></div>

<!-- paragraph:p0004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5 -->
<div><span>[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span></div>

<!-- paragraph:p0006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7 -->
<div><span>율법사가 주님에게 반문합니다. 대체 내 이웃이 누구냐고 합니다. 누군데 내 몸처럼 사랑하고 하느냐는 겁니다. 이웃에 대한 규정과 정의를 물은 겁니다. 그러자 주님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시며 37절을 보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span></div>

<!-- paragraph:p0008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9 -->
<div><span>무슨 뜻입니까? 이웃이 누구냐며 말 장난하지 말고,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 사랑은 말이나 이론이나 사변이나 교리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이웃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행하지 않을 뿐입니다. 실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려고 말 장난하며 도피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만 묻고 가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실천하라고 하십니다.</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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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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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예루살렘의 해발이 높습니다. 시온 산 꼭대기에 건설한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서 여리고까지 가려면 내려가야 합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계곡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려가는 27km 거리에는 절벽도 많고 천연 동굴도 많아서 지형도 위험하지만, 원래 거기에는 강도떼 출몰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마의 길이란 별명이 있습니다. 순례자나 상인들도 혼자는 위험해서 좀처럼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그 길을 어떤 사람이 혼자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span></div>

<!-- paragraph:p0012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3 -->
<div><span>그런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다가 강도 만나 죽어가는 그 사람을 발견합니다. 천만 다행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사장이니까 당연히 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사장은 도리어 그를 피해 달아납니다. 잠시 후 이번에는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그도 제사장처럼 성직자입니다.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옵니다. 그들은 제사장을 도와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직업적 성직자, 전임 사역자입니다. 목사는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쳤다 쳐도, 적어도 레위인을 그를 구해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번에도 우리 상식과는 달리 레위인마저도 줄행랑칩니다. 왜 그랬습니까? 누구보다 앞장 서서 희생당한 사람을 구해줘야 할 사람들이 달아났습니다. 주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외식을 고발하십니다. 사실 이 비유는 실화라기보다는 주님의 창작입니다. 주님이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비판입니다. </span></div>

<!-- paragraph:p0014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5 -->
<div><span>드디어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이지만, 늘 유대인으로부터 배제당했습니다. 이방인과 잡혼 했다고 개 취급을 받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공식 예배 때도 사마리아인을 저주하는 순서를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유대인들을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켜 정통 유대인, 더구나 성직자들을 무참하게 하십니다. 대체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주님은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34절입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다 죽어 가던 사람을 응급처치해서 병원까지 데려갑니다. 밤새 간호하다가 간병을 부탁합니다. 비용도 다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span></div>

<!-- paragraph:p0016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7 -->
<div><span>어째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해 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선대합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도 그렇게 당할까봐 미친 듯이 달아납니다. 그들은 비겁하고 속과 겉이 다른 위선자들입니다. 표리부동한 외식자들입니다. 그게 당시 그들에 대한 주님의 고발입니다. 물론 그들도 할 말은 있습니다. 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려면 시간과 비용도 필요한데, 어서 가서 예배를 집례해야 하기에 시간도 없었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말은 다 변명이고 핑계일 뿐이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을 보십시오. 그는 이것저것 재지 않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보자마자 도와줍니다.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발동합니다. 이게 맹자님이 말씀한 측은지심입니다. 이 비유는 강도 만난 자를 보면 불쌍한 마음만 가지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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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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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강도 만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났다는 건 유대인이었을 겁니다. 즉 사마리아인과 이 사람은 원수지간입니다. 만일 사마리아인이 지역 감정을 내세웠다면 측은지심을 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계산을 하거나 비겁한 마음을 먹었다면 강도 만난 자를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무엇보다 강도 만난 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을 보십시오. 얼마나 헌신적이고 책임적입니까? 강도 만난 사람은 이렇게 도와야 합니다. 이해득실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그래야 합니까?</span></div>

<!-- paragraph:p0020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1 -->
<div><span>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주님으로, 강도를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 사탄이라는 강도에게 당하고 버려져 죽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희생으로써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주막에다 우리를 맡기셨습니다. 어거스틴은 주막을 교회로, 주막 주인을 목회자라고 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맡기며 내가 돌아올 때 갚겠다고 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목회자로 하여금 강도 만난 자를 재림 때까지 맡기셨습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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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3 -->
<div><span>이것을 우리 현실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우선 강도 만난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 현실에 적용하면 누구이겠습니까? 현 대통령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우리나라가 강도 만났습니다. 그러면 강도는 누구입니까? 최순실과 그 일당들입니다. 그 공범들입니다. 정말 흉악한 강도떼, 도둑떼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입니까?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이해득실을 따지며 현장으로 달아나는 족속들이 누구입니까? 저는 더도 덜도 아닌 여야 정치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앞장 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하는데, 열심히 계산만 하고 있습니다. 이 불행을 이용해 득을 보려 하고 있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그저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 하나로 무조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구하고 봐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그런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을까요?</span></div>

<!-- paragraph:p0024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5 -->
<div><span>주님의 해답이 무엇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만이 강도 만난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그가 누구입니까? 주님은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듯 너희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죽어가는 이 나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손해를 감수하고 헌신적으로 강도 만난 이 나라를 치료하고 돕고 구하라고 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게 해법입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만이 강도 만난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주님의 처방입니다. 부디 피 흘리는 이 나라를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합시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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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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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28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Qq4r3KIqNzM"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