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5m 공중의 새를 보라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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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5m
마 6:25-34
공중의 새를 보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요즘 이것저것 염려가 되는 게 많습니다. 경주에서 계속되는 지진도 걱정입니다. 북한의 핵실험도 걱정이고, 사드 배치 문제도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해운, 조선, 철강 같은 지금까지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던 것들이 쇠퇴의 기로에 서 있다는 사실도 우리를 염려하게 만듭니다. 본문의 주제는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25절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세상에서 이 말씀보다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도 염려가 된다면, 공중의 저 새, 들의 저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쌓아두거나 하지 않아도 다 잘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치 어머니의 자장가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보다 무책임한 말도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염려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책임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내일 일을 위한 설계가 다 불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염려하지 않으려면, 기본적으로 염려하며 살 수밖에 없는 부조리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염려의 불가피성을 역설한다 해도, 주님은 여전히 염려가 우리 삶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본문에는 주님이 먼저 염려의 비생산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로마나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유대인도 신장의 열세에서 오는 신체적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이 이런 예를 드신 겁니다. 아무리 고민한들 작은 키가 자라겠습니까? 염려는 백해무익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염려가 비신앙이라고 하십니다. 30절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린아이들이 왜 염려를 하지 않을까요? 엄마 아빠를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무엇이든 다 해결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진도 7이나 8이 되는 강진이 발생해도 엄마 아빠만 옆에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가끔 상갓집에 가보면 아이들이 난리를 칩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다닙니다. 주님이 너희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도 어린아이처럼 순진하라는 말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듯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해야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아빠를 곁에 두고도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는 아이가 정상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염려는 불신앙의 소치라는 것이라는 게 주님의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처방은 이겁니다. 우선 내 삶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라고 하십니다. 왜 주님이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그들의 능력을 보라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존재의 근거, 생존의 원리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저 공중의 새가 거저 살아가지 않습니다. 들의 풀 한 포기가 제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심지도 거두지도 길쌈도 하지 않고 곳간도 없지만, 밤낮 염려하며 사는 우리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두 푼에 팔리는 저 미물의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완벽하게 먹이고 돌보시는데,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 한 포기도 저렇게 아름답게 입히고 키우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는 저것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며, 들의 백합화를 보며 그 사실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지 않고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맹목적으로 보지 말고 깊이 사색하며 보라는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공중의 새는 독수리가 아닙니다. 참새 한 마리를 가리킵니다. 번역상 참새이고, 원어로는 작은 새입니다. 참새보다 더 작은 박새 같은 겁니다. 반 푼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의 운명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러니 걱정하고 염려하지 맙시다.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에겐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니라 단지 창조주입니다. 하나님께도 그것들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하고 귀한 자녀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내 머리터럭 한 올까지 다 세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결국은 우리가 아직도 우리 인생을 내 힘으로 감당하려고 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날마다 걱정하고 고뇌한다는 얘깁니다. 이제는 좀 더 하나님이 내 운명의 절대적 주권자이심을 인정합시다. 우리의 모든 짐을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내려 놓읍시다. 그래야 염려로부터 우리 영혼이 해방됩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고 하십니다. 31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의식주가 먼저가 아닙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니라면 무엇이 먼저입니까?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언제나 이게 문제입니다. 주님은 분명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1순위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내 의식주가 1순위라고 합니다.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라고 합니다. 실은 그래서 우리는 밤낮 염려에 붙잡혀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못하며 사는 이유는 우리의 의식주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입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의식주를 염려 1순위로 놓고 사는 사람은 다 이방인의 의식입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이방인의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여전히 의식주를 내세우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가 내 인생 최고의 가치인한, 우리는 누구도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결코 평생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다 죽는 인생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말로 포장해도 결국 잘 먹고 잘 살자는 얘깁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하늘 아버지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는 것이 믿는 사람의 역설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새나 들꽃은 일용할 양식으로 삽니다. 그들에게는 곶간이나 창고가 없습니다. 은행 통장도 없습니다. 그날 그날 주시는 양식으로 삽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루 하루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았습니다. 요즘 우리는 절대 일용할 양식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창고에 가득 쌓아 놓아야 비로소 안심합니다. 우리는 탐욕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 불평하는 게 아닙니다. 내 욕심이 차지 않아서 불평합니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청빈, 무소유를 아름다운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이제는 어림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도, 세례 요한도, 바울도, 프랜시스도 다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거룩한 거지였습니다. 요즘은 가난이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가난하게 살라고 하면, 여러분도 다 달아나실 겁니다. 여러분, 인간의 탐욕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것 좇다가는 다 망합니다. 자족해야 합니다. 탐심이 자족을 방해합니다. 마음을 비웁시다. 욕심에 쩐 마음을 겸허히 내려놓읍시다. 여러분의 심령을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척박합니까? 다 탐욕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자족하며 감사하며 삽시다. 주님이 부자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가 잔뜩 쌓아 놓은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삽시다. 더 많은 것을 고집하는 한 평생 염려로부터 자유하지 못합니다. 후반기는 염려가 아니라 믿음으로 탐욕이나 불평이 아니라 자족과 감사로 삽시다. 염려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한 복 있는 영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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