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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20160911m</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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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시 34:1-8</span></div>

<!-- paragraph:p0003 -->
<div><span>맛보라!</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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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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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1]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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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7 -->
<div><span>요즘 마트에 가며 시식코너가 많습니다. 즉석에서 맛보고 구매하라는 겁니다. 본문 8절 말씀도 바로 그런 뜻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직접 한번 시식해 보라는 겁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선하심은 좋으심, 아름다우심, 복되심이란 뜻입니다. 여호와의 좋으심, 여호와의 아름다우심, 여호와의 복되심을 실제 체험하고 믿으라는 뜻입니다. 시편 34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1절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한다고 하고, 2절에서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고 기뻐한다고 하고, 3절에서는 여호와의 광대하심, 위대하신 이름을 높인다고 합니다. 왜요? 여호와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 말로 좋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여호와의 선하심을 직접 맛보라는 겁니다.</span></div>

<!-- paragraph:p0008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09 -->
<div><span>다윗의 찬양처럼 실제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인지 맛보도록 하겠습니다.</span></div>

<!-- paragraph:p0010 -->
<div><span>우선 하나님은 에벤에셀입니다. 에벤에셀은 사무엘상 7장 12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숱한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 오늘, 여기까지 돌보심에 감사하여 세운 돌비석이 에벤에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는 대혼란기였습니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습니다. 그래서 지도력의 공백이 생기고, 어수선한 틈을 타서 블레셋이 침공해 이미 여러 성읍을 약탈해 갔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법궤마저 빼앗겼습니다. 당시 엘리 제사장도 급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의 후계로 사무엘을 지도자로 세우시면서부터 혼란이 수습되었습니다. 도저히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여러 사정이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블레셋 군대를 이기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블레셋을 단속하셨습니다. 그동안 블레셋에 빼앗겼던 영토도 되찾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돌비석을 세우며 고백한 말이 에벤에셀입니다. 선하신 여호와께서 고난 가운데도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추석이 내일 모레입니다. 올해도 주께서 여기까지 우리 가정을 도우셨다고 진심으로 고백하시며 에벤에셀의 돌비석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41장 14절입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개역성경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다 버러지요 지렁이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더러는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도움이 이토록 처절하고 아프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망할 게 뻔한데, 저주를 자초하는데도 못 본 척 하는 게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깊은 절망에 빠뜨려서라도 정신 차리고 새 출발하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선하심, 복입니다. 올해는 하나님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심을 맛보아 압시다. 여기까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왔을을 찬양합시다.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적들이 굴복합니다. 빼앗긴 성읍을 되찾습니다. 사무엘이 살 동안 평화가 보장됩니다.</span></div>

<!-- paragraph:p0011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2 -->
<div><span>다음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마태복음 1장 23절에 나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고백과 확신이 임마누엘입니다. 에벤에셀이 지난 세월에 대한 감사라면, 임마누엘은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극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형을 등치고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빼앗습니다.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도망자가 되어 황량한 들판에서 노숙할 때 한밤중에 놀라운 신비 체험을 합니다.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와 땅에 닿습니다.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립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나타나시는데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셔서 야곱을 만나주십니다. 성경에서 임마누엘을 이보다 더 아름답고 입체적으로 묘사한 대목은 없습니다. 그날밤 벧엘의 사다리는 야곱이 올라가기 위해 놓인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러 내려오신 사다리입니다. 창세기 28장 15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자기는 이제 홀홀 단신고 천애의 고아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망명길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결코 떠나지 않겠다며 임마누엘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실제 30년간 야곱이 객지생활 하는 동안 하나님은 한 번도 그를 떠나진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심을 확증하셨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이 부르실 때 완강히 거절합니다. 자기는 말에 둔하다며 거절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설득하시기를,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걱정말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죽기까지 하나님은 한 번도 모세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임을 지키셨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등장할 때도 하나님은 임마누엘을 약속하십니다. 여호수아 1장 5절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다윗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녀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8장에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임마누엘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이 임마누엘의 진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은총임을 깨달아 압시다. 우리가 겪는 가혹한 시련, 날벼락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결국 우리가 승리하고 개가를 올립니다. 하나님이 다 우리을 당신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때로는 혹독한 매를 드십니다. 여기서 역설적으로 오히려 임마누엘의 은총을 맛보아 아십시다. </span></div>

<!-- paragraph:p0013 -->
<div><span><br></span></div>

<!-- paragraph:p0014 -->
<div><span>마지막으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에벤에셀이 지난 날에 대한 감사고, 임마누엘이 현재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체험이라면, 여호와 이레는 내일에 대한 기대와 확신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22장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의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마디로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그야말로 여호와 이레의 삶이었습니다. 목적도 없이 무작정 고향을 떠났는데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을 예비하셨습니다. 100세가 되도록 자식 없이 살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이삭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데는 하나의 관문이 있습니다. 이삭을 바치는 겁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외동 아들입니다. 한마디로 이게 사라지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요? 나의 목숨보다 10배 100배나 더 소중한 존재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는 일말의 저항도 반항도 없이 하나님께 항변도 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모리아산에 올라가 제단을 쌓고 아들을 결박해 제단 위에 누이고 칼을 뽑아 아들 목에 갖다 댑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맞습니다. 죽였습니다. 쇼한 게 아닙니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나를 말릴 것이라고 기대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발 자기를 말려주시길 기다린 게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이 아들을 잡아도 하나님은 내 아들을 살리신다고 믿었기에 미련 없이 아들을 잡겠다고 덤빈 겁니다. 그러므로 아들 이삭은 이미 죽은 겁니다. 실제 그의 아들의 목을 딴 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삭의 피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고 가장 원하는 것을 우리가 아니라 당신에게 바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 애정에 목마른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삭을 바치면 반드시 여호와 이레의 복을 주십니다. 부디 시늉만 내지 마시고, 실제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이삭을 묶어 제단에 올리고 칼로 목을 따십시오. 그렇게 온전한 헌상을 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이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안다고 하시며 후손과 땅의 복을 내리십니다. 올해는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이삭을 하나님께 헌상함으로 여호와 이레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체험하고 고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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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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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br></span></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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