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유명한 미국인 스님 현각의 최근 설법에 나오는 얘깁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어떤 사람이 거의 악을 쓰듯 소리치며 저만치서 다가오더랍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점점 더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가 하는 말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전도용 구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도인이 스님 바로 앞까지 다가 와서는 빤히 쳐다보더니 <당신은 왜 예수를 안 믿는냐?>며 호통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각 스님이 대뜸 <너 때문에!>라고 반격을 했더니 <당신은 지금 씻을수 없는 죄를 짓고 있어서 죽으면 반드시 지옥에 갈 것>이라며 저주를 퍼붓고는 휑하니 가더라고 했습니다.
현각 스님은 자신의 책 <만행 :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에서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는 평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했고, 그것은 비단 자기만이 아니고 한국에 나와있는 외국인 스님 모두가 다반사로 겪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 스님에게는 통하지 않을 그런 무례가 어째서 외국인 스님에게는 용납되는 것 일까요? 아마도 머리깎고 승복입은 별난 모습의 외국인이 그런 위기에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집단적 호기심이 결국은 그런 난감한 상황을 그저 두고만 보게하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기야 저는 장신대 교수로 있으면서 그것도 학내에서 어느 한 학생에게 잡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지금 죽어도 천국갈 자신 있습니까?>등의 도발적인 질문을 받은 적이 있으며,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있는데 다시 <교수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로 합시다. 교수면 어떻고 제자면 어떻습니까? 자, 제손을 잡고 제가 하는 영접기도를 그대로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마침 제 연구실 바로 앞 방이 조교실이어서 당장 조교 둘을 불러 그 무례한 친구를 제방에서 끌어 낸 적이 있습니다.
한 과일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 동네 교인들이 그를 전도하기 위해 숱하게 애를 썼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아침 그 과일 장수 아주머니가 말쑥하게 옷을 차려입고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저마다 <누가 전도했느냐? 어떻게 나오게 됐느냐?>며 묻자 그녀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우리 가게에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도 오시는 한 신사분이 계신데 그 분은 늘 좋은 과일을 골라가시지 않고 꼭 덜 싱싱하고 흠집이 있는 과일을 골라가시면서 ‘저는 가서 당장 먹을 것이니 괜찮습니다. 대신 다른 손님께 싱싱하고 흠없는 과일을 드리십시오!’ 그러십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분이 또 오셔서 과일을 사가지고 가시며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그 말씀만 하시고 갔지만 저런 분이 믿는 예수님이라면 분명 좋은 분일거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부터 교회에 다니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도라는 것으로 거친 말이나 무례한 행동이나 양식과 상식을 무시하는 처신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믿는 자로서의 참 모습을 기대합니다. 따라서 그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 또한 몇배나 더 크게 느낍니다. 이제는 정말 삶으로, 온 몸으로 전도할 때입니다.
말이나 구호보다 사랑과 관심으로, 인내와 희생과 모범으로 전도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