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1n 부름의 상을 위해(빌 3:12-14)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빌 3:12-14
부름의 상을 위해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올림픽이 지난 17일간의 열전을 끝내고 우리 시간으로는 내일 오전 폐막이 됩니다. 우리 선수들이 세운 목료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잘 싸웠습니다. 차기 올림픽인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착실히 준비하는 동기 부여 측면에서도 우리에게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번보다 다음 번이 더 중요합니다.
바울서신을 보면 육상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고대 올림픽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 보니 그들이 열광하는 달음질을 화두로 복음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달음질에 그렇게 열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호하고 익숙한 화두인 달음질을 소재로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한 겁니다.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을 달음질하는 경주자로 묘사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자세와 믿음으로 영적 경주에 임해야 옳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얽매이기 쉬운 것을 다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고대 올림픽은 주넌 766년부터 주후 393년까지 약 1200년 동안 거의 빠짐 없이 4년에 한 번 개최했습니다. 이 올림픽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출전 선수 전원이 나체로 경기했습니다. 어떤 종목이든 옷도 신발도 신으면 안 되었습니다. 왜 그래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고대 올림픽의 특징입니다. 어떤 학자는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라고 하고, 어떤 학자는 여성들의 참여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정설은 아닙니다. 어쨌든 운동선수들은 최대한 벗어야 합니다. 팬티 하나만 걸치고 뛰어야 합니다. 요즘은 신발도 최첨단 소재로 만들어서 안 신은 것처럼 가볍다고 합니다. 마라톤 선수의 스파이크는 수 억씩도 한다고 합니다. 여하튼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 달음질도 같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를 다 청산해야 합니다. 고대 헬라 사람들, 로마인들 또 유대인들의 복장을 보면 요즘 중동 사람들의 복장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달음질하기에는 부적절합니다. 그러려면 통으로 된 치마 같은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짐 때문에 달리는 데 장애를 느끼십니까?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5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다 벗었습니다. 그의 화려한 이력, 과거, 혈통까지도 다 내려놨습니다. 무엇이라했습니까?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게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나의 앞 길을 방해하면 미련 없이 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단호하지 않으면 어떻게 승리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고대 올림픽 때는 완벽한 알몸으로 뛰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실은 그게 올림픽보다 영적 달음질에 나선 우리에게 보다 절실합니다.
다음은 푯대를 향해 달려야 합니다. 1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또 14절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게 바로 달음질하는 바울의 목표의식입니다.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합니까? 히브리서 12장 1절 이하를 다시 봅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달음질하는 사람이 목표도 없이 뛴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9장 26절 이하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권투선수가 정확히 상대방을 가격해야 하듯이 육상선수가 골인지점을 향해 뛰어야 하듯 우리도 오직 주님을 겨냥해야지 뒤를 돌아보면 안 됩니다. 목표에 푯대에 집중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 이하입니다.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우리의 달음질은 영생을 위한 달음질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 이하입니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이것이 승리의 영생의 면류관을 받을 바울 사도의 최후 고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목표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게 현대 그리스도인의 최대 문제입니다. 지향점이 분명치 않은 것, 다 맹목적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생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을 향해 뛰고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을 향해 질주하고 있고, 기도하고 있고, 주일성수하고, 헌금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입니다.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썩을 면류관을 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울이 보기에는 이게 어이가 없는 겁니다. 부디 세상 미혹에 넘어가지 맙시다. 모두 함정이요 올무에 불과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우리는 아직 얻지도 잡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도상의 존재일 뿐입니다. 바울처럼 더는 과거에 안주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향해 명확히 영생을 향해, 부르심의 상을 푯대 삼아 열심히 달음질 합시다.
마지막으로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하반절입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고린도전서 9장 25절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고린도전서 9장 27절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여기에 나오는 인내, 절제, 자기 몸을 친다는 것은 자기와의 처절한 싸움을 가리킵니다. 모든 운동이 다 그렇습니다. 적과의 싸움 이전에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싸움은 세상과의 싸움도 가리키지만 자기와의 싸움도 가리킵니다. 선수는 자기관리에 실패하면 그날로 선수 생명이 끝납니다. 디모데전서 6장을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하면서 부자 되는 것을 피하라고 합니다. 성공적인 달음질하려면, 그런 마음까지 다 자제하고 피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믿음의 달음질에 나선 선수들입니다. 먹고 싶다고, 자고 싶다고 다 할 수 없습니다. 부단히 자기 몸을 치십시오. 그런 눈물겨운 자기 통제와 단속이 없으면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얼마나 자기 관리에 냉혹하고 비정하고 혹독한가가 중도 탈락이냐 완주냐를 결정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치열한 성도가 되셔서 모두 바울처럼 승리의 면류관을 얻읍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YouTube 시청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