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1m 바보들의 행진(수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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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6:1-9
바보들의 행진
[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바보들의 행진이란 영화 아시지요? 70년대 중반에 나온 하길종 감독의 영화입니다. 원래는 최인호 씨의 소설을 각색한 청춘영화입니다. 70년대 젊은이들의 상황를 묘사한 영화이고, 당시 고래사냥이란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머리 박박 깎은 병태가 서울역을 출발할 때, 영자가 차창에 매달려 키스하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바보들의 행진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손에 무기를 든 것도 아니고, 작전을 수립한 것도 아니고, 정예군을 선발한 것도 아닌 남녀노소의 오합지졸인데, 그런 사람들이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겠다고 날마다 한 바퀴씩 돌고 있습니다. 병태 친구 영철이가 술만 마시면 예쁜 고래를 잡겠다며 동해로 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바로 그 꼴입니다.
애굽을 떠난 지 40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에 첫 발을 내딛뎠는데 젖과 꿀이 흐른다던 가나안은 무위도식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앞에 우선 철옹성 여리고가 버티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 성채를 함락시킵니다. 우스꽝스런 그 바보들의 행진이 천연 요새인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기어이 거기에 여호와의 깃발을 꽂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한 겁니다. 우리 앞에도 태산 같은 성채가 버티고 우리를 위협합니다. 마치 그 옛날의 여리고 성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과거 이스라엘처럼 반드시 저 가공할 성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어떻게 그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 말씀에 절대 복종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절 하반절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이게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통해 일러주신 여리고 정복의 비책입니다.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무기를 주시거나 기발한 작전을 주신 게 아니라,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고 이레 째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터무니 없습니까? 아마 그 말을 처음 들은 여호수아도 기가 막혔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 말씀을 전해들은 백성들도 어이가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평화 시위요 데모이지 전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누구도 그 명령에 이의제기나 반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내심으로는 비상식적이었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무도 그 바보들의 행진에서 이탈하거나 낙오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말씀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순종이 내 앞의 거대한 성채를 정복할 수 있는 결정적 비결입니다. 아무리 현실성이 전혀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무조건 복종하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명령대로 살면 하루도 못 산다는 말을 우리 입에 달고 삽니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당연시하고 자기 고집대로의 삶을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늘 말씀 따로 우리 삶 따로 입니다. 완벽하게 따로 작동합니다. 그게 우리 삶에서 좀처럼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요 심각한 한계입니다. 말씀에 복종합시다. 우리는 미각이나 시후각보다 청각이 좋아야 합니다. 세미한 성령의 음성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눈은 작고 귀는 커야 합니다. 알뜰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복종하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왜 이레 동안은 한 바퀴요, 마지막 이레 째는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서 7은 완전수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완전한 복종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끝까지 복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나 하루 이틀은 복종할 수 있습니다. 사나흘도 가능합니다. 아무런 조짐도 없는 상황에서 닷새 엿새는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이레 째에 일곱 바퀴를 돌면서 순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기적은 마지막 날 마지막 바퀴를 돌아야 일어납니다. 주님은 우리가 끝까지 복종하는지를 보신 후에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마지막 날 다섯 바퀴만 돌았다면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까요? 여섯 바퀴를 돌았는데도 아무 조짐이 없어서 멈췄다면 그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까요? 우리는 마지막 바퀴까지 다 돌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복종의 행진을 결코 멈추지 맙시다. 끝까지 갑시다. 여리고 성은 이레 째 여섯 바퀴 반을 돌아도 멀쩡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일곱 바퀴까지 다 돌아야 합니다. 반드시 거기에 여호와의 승리의 깃발을 꽂아야 합니다.
둘째는 언약궤를 앞세웠습니다. 당시 행군 대열을 보면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고 언약궤가 뒤서고, 그 뒤에 백성들이 뒤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열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그랬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야 길에서도 언약궤가 늘 앞서 나아갔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이 낮에는 구름기둥이 백성들을 가이드 했습니다. 밤에 자다가도 불기둥이 움직이면 밤에도 행군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완주하지 못하고 길을 잃을 수밖에 없고, 낙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입니다. 이것을 모노 야웨이즘(mono-Yahwism)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을 독일말로 뒤따르는 자(Nachfolge)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제치고 내가 앞장 섭니다. 우린는 다 양입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어 목자를 뒤따라야만 합니다. 이스라엘도 제사장들이 왕이 나가신다며 양각 나팔을 불고, 언약궤가 나가고 그 뒤를 백성이 뒤따랐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그 대오를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태산 같은 성채를 함락시킵니다.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목자요 완벽한 가이드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를 무시하면 자살행위나 다름 없습니다. 양은 길을 잃으면 죽습니다. 진심으로 여러분 앞에 놓인 성채를 허물고 젖과 꿀이 흐르는 초장으로 나가길 원하신다면, 주님을 뒤쫒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다.
셋째로 함성을 내질렀습니다. 5절입니다.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하나님이 여기서 왜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까? 마지막 일곱 째 날 성을 일곱 바퀴 다 돌고 나서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면 모든 백성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성채가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왜 함성입니까? 마지막에 믿음의 기를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운동선수들이 마지막에 기합을 넣습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기합과 함께 자기의 모든 힘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겁니다. 그러면 굉장한 포발력이 발생합니다. 모든 백성이 큰 함성과 함께 믿음의 기운을 한 곳에 집중하면 정말 태산도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합심기도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비록 두세 사람이 합심해 기도하면 무엇이든 매고 풀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은 약하지만 여러 사람의 믿음의 기를 한 데 모으면 거기에 놀라운 영적 파워가 나타납니다. 함성을 지르는 것, 믿음의 기를 하나의 지점에 모으라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행동을 합니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 봅시다. 20절 이하입니다.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볼록 렌즈로 햇빛을 모으면 불이 붙듯이 백성들이 자신의 믿음을 집중하면 한순간에 다 무너집니다. 우리 앞에 놓인 태산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함께 함성을 지르며 믿음만 하나로 모을 수 있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믿음은 볼품 없어도 함께 함성을 지르면 놀라운 시너지가 발생합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칼 창 한 자루 가지지 않고도 난공불락의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베이스 캠프를 구축합니다.
올해도 끝까지 주님 말씀에 복종합시다. 늘 주님을 내 앞에 모시고 주님을 뒤따릅시다. 늘 함성을 지르며 믿음의 기를 하나로 모읍시다. 그래서 개인적, 가정적, 국가적인 성채를 무너뜨리고 정복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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