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24m 산에 올라가사(눅 9: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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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28-36
산에 올라가사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27절을 보십시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동안 탈도 많고 오해도 많았던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이 열두 제자를 앞에 두고, 더 정확히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는 신앙고백을 한 직후 그 자리에서 바로 27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재림하는 것을 볼 자도 있다고 하신 겁니다.
이 말씀을 마태복음 16장 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가복음 9장 1절은 이렇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초대교회는 매우 종말론적이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사도들이 아직 살아있을 때 다시 재림하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그만큼 뜨거웠고 서로 유무상통하는 공산생활까지도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이 다투어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앞에 두었습니다. 사실 그래서 집사가 필요했습니다. 사도들이 집사를 뽑아 그 돈을 집사들에게 맡기고 가난한 자, 고아, 과부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살았습니다. 이게 공산 공동체입니다. 공산주의가 이걸 모방한 겁니다.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고 했기 때문에, 주님이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오신다고 했기에 뭐든 아까울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이 하나둘 죽고 여기저기서 순교를 당해 거의 다 세상을 떠났음에도 기다리던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교회가 ‘이거 뭔가 잘못 됐나보다. 우리가 뭔가 오해하고 있나 보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착수한 작업이 성경을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복음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한 겁니다. 복음을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승천하신 지 40-60년이 지나 비로소 성경을 만드는 일을 착수한 겁니다. 바울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개종해서 소아시아를 순회하고 다니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바울서신보다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습니다. 바울서신은 주로 50년대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70년대에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90년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냐면, 종말론적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복음서를 기록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낀 겁니다. 주님의 재림이 자꾸만 지연되니까 사도들이 다 죽기 전에 성경부터 만들자고 한 겁니다.
주님은 왜 이토록 재림이 긴박한 것으로 표현하셨을까요? 밀림의 성자로 알려진 알버트 슈바이처는 원래 유명한 성서학자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주님이 착각하셨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주님도 자신의 재림이 정말 그렇게 긴박하게 이루어질 줄로 잘못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 급하게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 사실을 교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나온 게 기독교 교리의 종말론이라고 했습니다. 왜 종말론이 나왔느냐면, 지연된 주님의 재림을 변명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절대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재림 일정을 착각하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주님은 재림을 긴박하게 말씀하신 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졸지 못하게 하려고, 늘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 늘 종말론적 긴장을 가지고 근신하며 살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왜냐면 주님의 재림은 도적 같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곧 닥칠 일로 말씀하심으로써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집니다. 지금까지도 안 오셨는데,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무책임하고 안일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생전에 주님의 재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재림 사건은 도적 같이 임하기에 그야말로 늘 긴장하며 근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 그렇게 살기를 바라시기에 항상 재림 사건을 긴박한 사건으로 묘사하십니다. 슈바이처처럼 주님이 착각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 28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27절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27절 말씀과 28절 말씀을 서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과 27절 말씀을 연결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뜻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이 주님이 27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체험이고 주님 재림의 모형이라는 뜻입니다.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주님과 회동합니다. 장차 주님이 재림하시면 죽은 자는 신비한 부활체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살아 있던 자는 산 채로 변화되어 주님을 영접합니다. 여기 나오는 모세는 주님 재림하실 때 부활체로 다시 살아날 모든 죽은 자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죽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곧장 하늘로 간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주님을 맞을 모든 산 자를 대표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도래를 미리 연출해 보인 사건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본문의 변화, 광채, 영광, 구름은 주님의 재림을 묘사하는 어휘들입니다. 당시 그 광경이 얼마나 황홀했으면 베드로가 아예 여기에 초막을 짓고 살자고 합니다. 그러므로 27절은 28절 이하에서 보여주신 재림의 모형, 변화산 체험을 말씀한 것입니다. 슈바이처 말처럼 주님이 당신의 재림을 착각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러한 전제를 갖고 본문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핵심 트리오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가장 가까이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들만을 편애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마가복음 5장 37절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믿음 약한 자들은 물러서 있게 하시고 이들 트리오만 죽은 자를 살리는 자리에 데리고 가십니다. 마가복음 14장 32절 이하입니다.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실 때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가까이 두십니다. 오늘 본문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십니다. 주님은 이 세 명의 제자들에게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이실 뿐만 아니라 몇 가지를 더 알려주십니다.
먼저, 기도입니다. 28절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이어지는 29절입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주님은 기도하러 세 명의 제자들과 산에 오르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면 용모가 변화되고, 그 삶도 변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산 아래에서 늘 분주하게 일상을 보내다 보면 기도할 때 집중하지 못합니다. 자꾸만 다른 생각이 껴듭니다. 그래서 가끔은 일상에서 벗어나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려고 주님은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오르신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이게 꼭 필요합니다. 가끔은 주님과 교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표정이 밝아지고 내 모습에서 빛이 납니다. 보십시오. 기도할 때에 그 용모가 변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우리도 기도하면 우리 모습이 달라집니다. 삶이 변합니다. 우리의 인격에서 향기가 납니다. 그걸 훈련시키려고 주님은 세 명의 제자를 산상으로 이끄셨습니다.
다음은 신비체험을 위해서입니다. 30절 이하입니다.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제자들은 산상에서 주님의 변화되신 용모와 광채뿐만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주님과 대화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놀라운 영적 체험이고, 일생 일대의 체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전설적인 구약의 인물을 본 겁니다. 여러분, 신앙세계에는 분명히 초자연적 체험이 존재합니다. 우리에게도 가끔은 그런 신비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 신앙이 깊어지고, 덜 흔들립니다. 주님도 그 점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신비체험을 맛보게 하신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신비체험에 머무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고 여기에서 살자고 한 제안을 수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신비체험을 하면 거기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7장 9절입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영적 신비체험은 가끔씩 맛보되 그걸로 점쟁이 노릇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올 여름에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산에 올라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우리 영성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 삶의 많은 것이 새로워집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입니다. 말씀훈련을 위해 주님이 세 명의 제자를 산으로 이끄셨습니다. 35절입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이 세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은 복잡한 일상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은 너무 소란하고 어지럽습니다.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갈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하기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제자들처럼 가끔은 산에 올라가야 하고, 골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애써서 집회나 수련회에 참석하려는 것도 거기에서 평소에는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 55장 3절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우리 교회도 다음달에 변화산에 오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서 내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내 영혼이 더욱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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