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7m 나사로야 나오라!(요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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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17-44
나사로야 나오라!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주님은 사흘만에 다시 사셨는데 나사로는 나흘만에 다시 삽니다. 39절입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럼에도 주님이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자, 44절을 보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십니다. 전무후무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사로를 두고 부활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죽었다가 되살아났다, 소생했다, 회생했다고 하지, 부활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부활은 그냥 살아나는 게 아닙니다. 부활은 신비한 부활체로 변해서 살아난 겁니다. 부활은 더는 죽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인 부활장을 보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으로 되살아나는” 게 부활입니다. 주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신비한 부활체로 다시 사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천국에 가셨는데, 부활체로 가셨습니다. 영으로 하늘에 가신 게 아니라 부활체로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나사로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닙니다. 주님만이 명실상부한 부활의 첫 케이스입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부활체가 아니라 죽기 전의 상태, 죽기 전의 몸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부생했다고 하지 부활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회생, 소생입니다. 나사로는 일정기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부활이 아니어서 다시 죽은 겁니다. 그러나 그게 비록 부활은 아니더라도 죽은 자가 이미 부패가 되어 냄새가 났는데,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왔다는 것은 유사 이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드라큘라가 몇 백년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왔다고 합니다. 중세 인물인데 다시 살아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포소설일 뿐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역사적 인물이고 그의 사건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우선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신속히 주님께 알렸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 들어 갈수록 위중하다는 사실을 주님께 알렸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입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주님은 이때 멀리 계셨습니다. 나사로는 유대 성 밖 베다니에 있었고, 주님은 고향마을인 갈릴리에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자기들의 절박한 사정을 주님께 신속히 알렸습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 내가 겪는 문제 해결의 첫 걸음입니다. 물론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어디에 계시든 내 사정을 훤히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입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11절도 보십시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14절도 보십시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주님은 이미 갈릴리에 계시면서도 남쪽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께 위기에 처한 나의 상황을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오셔서 내 문제를 수습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날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바다 건너편으로 가고, 주님은 홀로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입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제자들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고, 주님은 산에 홀로 계신데, 제자들이 바다에서 겪는 난감한 문제를 다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애타게 호소하자, 밤 4경 쯤에 바다위로 걸어오시며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고 하며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십니다. 또 한 번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시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마침 주님은 선미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엄청난 파도가 덮쳐 제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파도와 사투를 벌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잠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4장 38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그제서야 주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파도를 제어하십니다. 주님 같이 예민하신 분이 제자들이 그 난리를 치는데도 세상 모르고 주무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주님은 깨워주기를 기다리며 그 상황을 다 지켜보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이 다 알고 계신데, 뭘 그렇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냐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내 한계를 겸허하게 시인하고 진심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사정은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만, 도움은 내가 주체적으로 주님의 개입을 청해야 비로소 주님은 움직이십니다. 왜냐면 우리가 얼마나 사악한지를 주님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알아서 해주시면 누가 그걸 주님의 은혜로 인정하고 감사히 여기겠습니까? 재수가 좋다고 하고, 내가 지니고 다니는 부적이 효험이 있다고 하고, 조상 묘를 잘 써서 좋게 됐다고 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몰라서가 아니라 다 아시지만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 다음에 응답하십니다. 헛소리, 변명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아무튼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께 신속히 오라버니 나사로의 병세를 알리고 주님의 도움을 구했다는 것을 기억하십니다.
다음은 돌문을 옮겨놔야 합니다. 39절 상반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41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주님은 돌을 옮겨놓으니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에 착수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몫은 우리 스스로 책임을 다해 감당하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 놓는 일은 고된 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주님의 무덤에 찾아가면서 걱정하던 일도 바로 돌문 옮겨 놓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어떤 희생,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이 못해서가 아닙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떼돈 벌게 해달라, 공부도 안 하면서 성적 좋게 받게 해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브라질 올림픽이 보름 남짓 남았습니다. 선수들이 훈련도 제대로 안 하고 금메달 따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람이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책임져야 합니다. 복권이나 카지노 같은 도박 문화가 기독교 신앙에 부합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당한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불로소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힘껏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고 그 다음에 주님이 나사로를 불러내시는 기적을 바라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약삭빠른 사람은 사전에 가능성을 계산하고 지레 포기합니다. 믿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는 겁니다. 거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난감해 하나, 비로소 돌문을 옮겨놓자, 주님이 나사로를 불러내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주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실 은혜의 경계를 확실히 구획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가 해야 할 물리적인 일들은 반드시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우리 몫까지 주님께 떠넘기면 안 됩니다. 지금도 이 문제 때문에 뭔가 해결이 지체되는 개인이나 가정은 없으십니까? 혹 지금 우리 교회도 이 문제로 막혀 과제가 지연되는 부분은 없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사력을 다해 무덤의 돌문을 옮겨놓을 때 나사로를 불러내신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할 일을 회피하면 그만큼 문제의 해결이 늦어질 따름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뭔가 기도응답이 지연되고 있다면 바로 이점을 확인해 보십시오.
다음은 주님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합니다. 25-26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대답은 27절입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우리는 주님의 부활, 생명 되심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어야 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속에서 썩어가던 시신도 주님이 불러내시면 수의 입은 채 걸어 나올 수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시신도 불러내십니다. 주님은 ‘너희가 그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못 믿기에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아니라 실은 우리의 믿음이 기적을 결정합니다. 가나 혼인집에서 주님은 기적을 행할 뜻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어머니에게 ‘여자여 이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 마리아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하자, 주님이 승복하십니다. 하인들이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가득 채우자, 여섯 항아리 가득 양질의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본문 41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주님의 믿음입니다. 아직 나사로를 불러내시기도 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 말을 들으신 걸 감사한다고 합니다. 42절도 마찬가집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항상 선제적으로 감사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기도 전에 나사로의 소생을 하나님께 감사부터 드렸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26절에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을 때, 마르다는 즉각 대답했습니다. ‘주가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해 보시고 기적을 허락하십니다. 믿음 없는 사람에게 은혜와 기적을 베푸시지 않는 것은 그게 하나님께 영광보다는 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돼지에게는 절대 진주를 던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그릇이 준비 되었는지 확인하시고 거기에 담을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네가 믿느냐?”
주님을 믿읍시다. 우리의 형편이 아무리 어렵다한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냄새나는 시신까지도 다시 무덤에서 불러내신 분이십니다. 기어이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불러 내사 큰 슬픔에 빠진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게 오라비를 돌려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함부로 포기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이요 구원인 이유입니다. 주님에게는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일찍이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주님의 그 무한하신 권능이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새롭게 하고, 새출발하는 은혜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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