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03m 원초적 감사 (살후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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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3m
살후 2:13-17
원초적 감사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오늘이 한 해 밭농사의 첫 열매인 보리 수확을 감사하는 맥추절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날이 맥추감사절 이상의 뜻깊은 절기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기원이 언제입니까? 2000년 교회사의 원년이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시고,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오순절 날에 성령이 불같이 강림하셔서, 그때부터 제자들이 물불 안 가리고 주님을 증거한 것이 교회의 기원입니다. 성령 강림으로 기독교가 탄생했고 교회가 출범했습니다. 주님이 교회를 만드신 게 아니라, 제자들이 만들었습니다.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겁니다. 그 성령 강림이 오순절이라는 유대교 전통의 오랜 절기 날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오순절이란 말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오순절을 칠칠절로도 불렀습니다. 유월절로부터 일곱 안식일 다음 날에 지키는 절기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오순절을 초실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한 해 밭농사의 첫 열매,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것이 모두 맥추절을 가리킵니다. 맥추절, 오순절, 칠칠절, 초실절이 다 같은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맥추절,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성령이 강림해서 기독교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맥추감사절인 이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사 교회의 기원이 되게 하셨을까요? 오순절이 바로 초실절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 농사의 첫 열매를 감사하는 절기여서 그렇습니다. 성령 강림이 곧 교회 역사의 첫 열매라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 사건이 기독교의 초실입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이 오순절 날에 일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성령 강림 사건이 바로 기독교의 첫 열매요 맏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으로 기독교의 새 역사가 열렸습니다. 성령 시대가 개막한 겁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모릅니다. 사실상 교회의 생일이 맥추감사절입니다. 단순히 보리 수확 감사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뜻깊은 날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원초적인 감사의 근거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문 13절 상반절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항상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여러분은 이런 말씀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항상 감사가 공감이 되십니까? 현실성이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항상 감사하고 모든 일에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까? 오늘이 맥추감사절이고 가을에는 추수감사절이 있는데, 일 년에 한두 번 감사절 때 감사하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이렇게 날마다 순간마다 일마다 사건마다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비현실적이고 과장이고 허세 아닙니까? 우선 올 상반기만 해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일만 있었습니가? 매 순간 삶이 즐거울만큼 오직 좋은 일만 있었습니까? 오히려 우울하고 불쾌하고 짜증나는 일이 더 많지 않았습니까? 또 피해의식, 배신감, 비애감 때문에 혼자 끙끙대던 일이 훨씬 더 많지 않았습니까? 현실이 이런데 항상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터무니없는 바울의 이상주의요 낙관주의입니까?
바울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런 가운데도 우리가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믿는 자라면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바울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13절 상반절을 다시 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셨기에 일 년에 한두 번이 아니라,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맞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늘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절대 남보다 더 낫고, 더 착하고, 잘 나서, 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교회 봉사도 더 많이 해서,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합산하여 점수가 남보다 더 높아서 나를 택해주신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처음이란 태초입니다. 아니 태초 이전, 창세 이전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이하입니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 이전, 회개 이전, 충성 이전, 창세 이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뜻이고, 바울은 이게 바로 우리의 원초적 감사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여러분, 선택은 절대 나와 하나님의 합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99.9%를 투자하고 내가 0.1% 투자한 합작 회사가 아닙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완벽하게 이루신 하나님만의 절대적인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게 도리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사정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원초적인 선택이라는 감사의 조건이 있기에 얼마든지 전천후로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 조건없이 창세 전에 나를 택해주심에 감사하며 살면, 상대적인 현실의 어려움을 얼마든지 극복하며 살 수 있다는 게 바울의 역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 원초적 축복을 자주 망각합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시험이 와도 감사가 실종됩니다. 절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지으면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해야 맞습니다. 부디 맥추절을 기해 우리 감사 목록 제1호인 하나님의 선택을 깊이 생각하시며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다음은 역시 13절 하반절입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관리하고 계십니다. 어떻게요? 거룩하게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는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격려하사 우리의 성화를 도우십니다. 그게 또한 우리가 원초적으로 감사해야 할 근거입니다. 여러분, 성화는 선택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최대 과제요 지상목표입니다. 왜냐면 천국이 거룩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십니다. 천군천사가 다 거룩합니다. 하나님을 보좌하는 24장로가 다 거룩합니다. 보좌 주변의 4생물이 다 거룩하고, 앞서간 성도가 다 거룩합니다. 천국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한 모습으로 천국 가야 합니다. 그래야 문화적 충격 없이 천국 사회에 잘 적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정서적인 이질감 없이 천국 공동체에서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으면 천국 갑니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복 되고 완전한 세계요, 그곳은 더는 아픔도 슬픔도 눈물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안식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도 하루라도 빨리 죽어 그 좋다는 천국에 남보다 먼저 가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든 이 땅에서 더 버티기를 원합니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일단은 만의 하나라도 천국이 없거나 지옥 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삶에 대한 본능적 애착이나 미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내가 아직 주님 앞에 설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영적 부담감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죽어 천국 가겠지만, 지금 당장 주님 앞에 설 자신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었다는 얘기는 무슨 뜻일까요? 주님을 뵐 채비가 안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화가 덜 됐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구원 받은 당신의 자녀를 최대한 이 땅에 두시다가 데려가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 성화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의 천국 생활이 더욱 복 되고 거기서 누릴 영광도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한 달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빨리 들어가게 하지 않고 무려 40년간이나 광야에서 뺑뺑 돌게 하신 것은 성화 때문입니다. 400년 간의 애굽생활의 때를 벗고 성화되라는 말미를 주신 겁니다. 그럼에도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죽을 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창세 전에 이루어진 선택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성화는 그 주체가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입니다. 성화는 내가 노력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노력하고 헌신하고 희생하고 부단히 거룩한 품성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화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경건훈련, 영성훈련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은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구원이 아니라 순수 내 몫인 성화를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하고, 경건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주체인 성화마저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론상으로는 분명 성화의 주체가 나 자신이지만, 실제로는 성령이 나를 돕지 않으면 성화도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바로 오늘, 맥추절에 2000년 교회사의 맏물로, 첫 열매로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성령은 계셨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을 기해 크게 강림하심으로써 본격적인 새 시대, 교회 시대, 기독교 시대를 활짝 여셨습니다. 지금도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부단히 우리의 성화를 돕고 계시기에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무심합니까?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의식하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내 안의 성령이 노심초사하시며 우리를 자극하십니다. 우리가 둔감해서 그걸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과 교감하며 살지 못합니다. 성령을 근심케 합니다. 이번 기회에 내 안에 계신 성령을 깨달읍시다. 밤낮으로 우리의 성화를 도우시는 성령께 감사합시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원초적인 감사의 근거입니다.
마지막으로 위로와 소망입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올해도 우리는 상반기를 고단하지만 무너지지 않고 하반기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때문입니다. 말씀을 공급해주시고, 기도할 때마다 소망과 비전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올해도 우리가 이렇게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세상에도 나름의 기쁨과 소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세상이 주는 위로와 소망은 거짓입니다. 마치 마약과도 같습니다. 로또와도 같습니다. 그런 것 열심히 좇다가는 다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은 참 되고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한 힘이 되고 삶의 큰 격려가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며 얼마나 자주 위기에 몰리고, 절망감과 좌절감으로 흔들립니까?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사실은 속으로 얼마나 자주 웁니까? 그럼에도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열심히 살겠노라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은 주님의 위로와 소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사는 게 백 번 옳다는 것입니다.
시편 90편은 다윗의 시가 아니라 모세의 시입니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모세가 그 숱한 환난과 시험을 통해 배운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가? 인생의 영화라는 게 풀과 꽃 같이 시드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인생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게 옳다는 게 모세의 결론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속이고 배신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영원한 소망을 품게 하십니다. 그것으로써 우리가 세상을 이기게 하십니다. 바울이 권면한 이 세 가지 원초적 감사의 근거를 늘 마음에 깊이 새겨서 하반기에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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