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6m 위대한 믿음의 선진 (히 11:23-29)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20160626m
히 11:23-29
위대한 믿음의 선진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히브리서 11장은 명예의 전당입니다. 여기에는 위대한 선각들이 나옵니다. 아벨부터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까지 유수한 인물이 소개가 되고 있는데, 오늘의 주인공은 모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렇습니다만, 모세라는 인물은 특별히 영웅적입니다. 모세의 생애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기적의 연속입니다. 그의 출생부터 남 다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히브리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했는데도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바로 왕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 궁중에서 자랍니다. 거기에서 온갖 질 높은 궁중교육을 다 받습니다. 호렙산 가시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장면도 말할 수 없는 그 자체입니다. 바로를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을 진두지휘해 출애굽하는 장면도 가히 위대한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쳐서 샘이 분수처럼 터지는 사건도 다 극적이고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도 그렇습니다. 신명기 34장 7절입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가 지금 요단강 너머 저 멀리 가나안 땅이 바라다 보이는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조용히 최후를 맞습니다. 그때 나이 120세였는데, 아직도 정정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의 시체를 감추셔서 누구도 모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마저도 신비에 싸인 사람입니다.
물론 그가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죽은 사건을 두고, 그가 천국을 못 간 게 아닌가 라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못 들어간 이후가 므리바 사건 때문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폭동을 일으켰을 때, 하나님은 분명 지팡이로 반석을 가리키라고 했는데, 성질이 머리끝까지 난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후려칩니다. 샘은 터졌습니다만, 하나님은 ‘너는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인 이유이고, 정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깊은 뜻은 다른 데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천국 못 간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모든 율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구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율법서 또는 모세 5경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기록한 책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곧 모세고, 모세는 곧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므리바 사건이라는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은 그 사건이 말씀하는 진정한 복음적 메시지가 바로 율법으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시기 위해 율법의 화신인 모세를 굳이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최후를 우리를 위해 희생시킨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정말 천국을 못 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요단강을 건너는 것으로, 가나안을 천국으로 이해합니다.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못 들어갔으니 천국에 못 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이 사건으로 복음적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셨을 뿐입니다. 주님은 변화산 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아를 불러 산상회담을 하십니다. 그 사건이 바로 모세가 천국에 갔다는 사실을 특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주님이 지옥에 가 있는 모세를 불러 변화산에서 회담하신 게 아닙니다.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 여호와의 종이라 불렀습니다. 신명기 34장 10절은 모세를 두고 ‘이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못했다고 하면서 모세는 여호와와 대면하였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27절 상반절입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짤막하지만 모세에 대한 평가입니다. 애굽을 떠나는 데서 그의 믿음이 평가됩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애굽에는 온갖 낙이 있고, 금은보화가 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단호히 애굽을 떠났습니다. 모세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25절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이어지는 26절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세가 그리스도를 알았을까요? 모세는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사람이고, 주님으로부터 1,5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를 알았을까요? 몰랐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모든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모세는 자기의 모든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고 당하는 모든 수모와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과 수모로 간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게 비록 세상살이를 하며 당하는 고난이라도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수난으로 적립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희생과 아픔과 고난에 상당하는 상을 내리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짚고 가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대한 미련을 쉽게 접지 못하는 것은 애굽이 주는 낙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짝하는 이유는 세상이 주는 쾌락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세상 낙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25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세상 낙은 그게 본질적으로 죄악의 낙이고, 그것은 잠시라는 겁니다. 애굽의 낙, 세상의 낙이 아무리 달콤하고 현란하다 해도 시한부입니다. 모세는 그 세상 낙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과 영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하나님의 상을 바라며 애굽의 모든 낙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언제나 그 반대입니다. 애굽의 낙, 잠시잠깐 누릴 세상 낙을 위해 늘 하나님의 상과 영광을 버립니다. 우리는 늘 에서와 같습니다. 항상 눈앞에 보이는 팥죽 한 그릇에 하나님의 영광의 장자권을 태연하게 팝니다.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잠시잠깐 누릴 죄악의 낙과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지 맙시다. 우리도 모세처럼 미련 없이 애굽을 떠납시다. 더는 애굽의 현란한 불빛에 현혹되거나 미혹되지 맙시다.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고 세상 낙은 잠시잠깐입니다. 속지도 말고 도박하지도 맙시다.
모세는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본 사람입니다. 본문의 평가인 2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그렇습니다. 당시 모세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바로를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맞서 담대히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내 앞에 서 계시듯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합니까? 왜 우리가 돈과 세상 권력을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온갖 상대적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 비결은 우리가 절대로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모든 허깨비 같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세상 왕이, 세상 권력이 나를 대적한다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결코 비겁하거나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29절입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당황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날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만일 모세가 애굽의 전차 군단을 바라보고, 삼킬 듯 넘실대는 홍해를 바라보고, 절망하는 백성들을 바라봤다면, 그도 별수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저앉고 말았을 겁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분명 그도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만, 위협적인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 성난 바다에 빠졌습니다. 파도 너머에 계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을 바라봐야 홍해가 갈라지고, 바로의 군대가 수장되고,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모세는 하나님만을 바라봤습니다.
모세는 어린양의 피를 믿었습니다. 28절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모세가 바로 앞에서 행한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 재앙입니다. 그 마지막 재앙에 결국 바로가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 아무도 장자를 잃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사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일러주신 처방이 있었습니다.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그 어린양의 피가 발린 집을 넘어가리라(유월)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모세가 그 비방을 백성에게 전했을 때,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믿지 않고 미신이나 허황된 소리로 치부했다면, 그가 비록 유대인이었을지라도 그 집 장남도 이튿날 아침 시체로 발견되었을 겁니다. 여러분, 유월절 어린양이신 주님의 보혈을 믿으셔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를 죽음의 사자에게서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가 착하냐 악하냐는 필요 없습니다. 그것 따지지 마십시오. 그가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도 따지지 마십시오. 무조건 어린양의 피입니다. 다행히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말을 잘 따라서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발랐기에 장자가 죽어나가는 재앙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애굽 사람 가운데 용케 정보를 입수한 사람이 그렇게 했다면, 그 집의 장자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살인강도가 용케 그 정보를 입수해서 자기 집 문에 어린양의 피를 칠했다면, 그는 자신의 장자를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28절에서 말씀하신 <피뿌림>이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피뿌림>과 <피흘림>은 다릅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주님이 전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이 객관적 사실은 <피흘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내 집에, 내 이마에 발라야 합니다. 이것이 <피뿌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내가 믿고 내 집 문에 뿌려야 합니다. 주님이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셨다는 것을 내가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보혈의 효험이 내게 나타납니다. 공장에 피뢰침이 아무리 쌓여 있어도, 그걸 사다가 내 집에 달아야 벼락을 맞지 않습니다. 피흘림과 피뿌림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십시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바로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한 보혈이었음을 믿고 확신하시고 고백하시고 감사하십시오. 그게 어린양의 피, 주님의 피를 가져다가 내 이마에 바르는 예식입니다. 그게 우리 집 문설주에 주님의 보혈을 뿌리는 예식입니다. 여러분도 결코 죽지 않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YouTube 시청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