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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5m 아담과 아다마(창 1:26-28)-환경주일

20160605m

창 1:26-28

아담과 아다마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지난 화요일이 유엔이 지정한 바다의 날이고, 오늘은 유엔이 정한 세계 환경의 날이며, 교회에서는 환경보전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전통 절기 가운데 망종입니다. 씨 뿌리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입니다. 환경주일을 맞아 사람과 환경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과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이 있으라 하시며 말씀으로 창조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25절부터 보십시오.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말씀이 아니라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흙이 원어로 <아다마>입니다. 사람은 원어로 <아담>입니다. 두 단어의 어원이 같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허무를 노래하자는 게 아니라, 인간도 자연이라는 말입니다. 인간도 원래 흙이라는 겁니다. 흙이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은 흙입니다. 자연이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은 자연입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신토불이는 사람의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유한 철학이면서 동시에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아담과 아다마, 자연과 사람의 운명이 별개가 아니라 맞물려있다고 합니다. 사람과 자연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 운명체로 봅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이어지는 18절 상반절도 보십시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잘못은 사람이 했는데 왜 애꿎은 땅도 저주를 받습니까? 실제 이때부터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고, 누구도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고서는 소산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텃밭을 가꿔본 분은 아실 겁니다. 심은 적도 없는데 풀이 채소보다 훨씬 더 잘 자랍니다. 한창 자랄 때는 그 기세가 무섭습니다. 농사는 풀과의 전쟁입니다. 그게 다 인간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 받은 결과라는 겁니다. 노아의 때도 그랬습니다. 창세기 6장 5절 이하입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사람의 죄가 세상에 가득하고 그들의 생각이 항상 악하여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셨다면, 사람들만 쓸어버리시면 될 일인데, 왜 가축과 공중의 새까지 다 멸절시키겠다고 하십니까? 그 아래 17절도 보십시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죄 지은 사람만 멸절하시겠다는 게 아니고 땅에 있는 것을 다 죽이시겠다고 합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신토불이여서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자여과 사람, 아다마와 아담이 둘이 아니라 하나여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타락하면 자연도 함께 타락하고, 사람이 저주를 받으면 자연도 함께 저주를 받고, 자연이 파괴되면 사람도 파괴되고, 사람이 회복되면 자연도 회복됩니다. 


바울의 자연관을 보면 이 사실이 더욱 극명해집니다. 로마서 8장 19절 이하입니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바울은 들에 핀 아름다운 한 송이 꽂을 보면서, 자연을 예찬하고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기보다, 그 자연에서 신음소리, 처절한 비명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이 글을 쓸 때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입니다. 그때 무슨 공해, 오염, 환경파괴, 생태학적 파국이라는 개념이 있었겠습니까? 그때는 자연이나 환경이 원시 그 자체였을 겁니다. 그런데도 자연이 신음하고 있고, 탄식하고 있고, 허무와 썩어짐의 종 노릇하고 있어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구약의 신토불이 사상에서 온 겁니다. 아다마에서 온 아담이 죄를 짓자, 아다마도 함께 저주를 받아 함께 신음하고, 새롭게 거듭난 사람들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야 자연도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인간이 회복 되어야, 인간의 죄로 인한 저주에서 놓여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면 할수록, 인간의 죄가 막장으로 가면 갈수록, 자연은 더 황폐해지고, 환경문제도 더욱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신음소리가 더 처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귀에는 안 들리나 하나님의 귀에는 자연의 비명이 잘 들립니다. 영성의 대가 바울은 그 자연의 비명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만 구원하시고, 이 세상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서 사람만 가장 사랑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우리가 즐겨 암송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만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못지 않게 자연도 사랑하시고 자연도 구원하는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사람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해 왔고, 나 좋을 데로만 해석해서 아전인수식으로 적용해왔습니다. 본문 28절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우리는 오직 자연의 정복자, 약탈자가 되라는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원뜻은 돌보고 지키라는 겁니다. 자연파괴자가 되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 상태로 자연을 보존하고 관리하고 지키라는 뜻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인간 못지않게 자연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뿐 아니라 자연도 구원하십니다. 노아의 방주를 보십시오. 축구장 크기의 유조선처럼 생긴 배인데, 내부가 3층으로 되어 있었기에 연면적은 축구장 세 개 규모입니다. 그러나 그 큰 방주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달랑 노아의 8식구가 전부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120년간이나 그 큰 배를 건조하게 하셨습니까? 노아의 방주는 결코 사람의 구원만을 위한 배가 아니라, 자연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방주의 1층과 2층은 동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3층에는 노아와 동물이 1년간 먹을 사료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한켠에 노아의 여덟 식구가 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뿐 아니라 자연도 함께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왜 공중에 날아가는 새를 보라고 했을까요? 새 깃털에 주예수를 믿으라는 성경 구절이 적혀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저 들풀 한 포기도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생들만 먹이고 입히는 분이 아니기에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머리털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새의 깃털도 다 세고 계시고, 하나님은 사자의 수염도 다 세고 계시고, 호랑이의 이빨도 다 세고 계십니다. 자연은 숭배의 대상도 아니지만, 절대 파괴나 약탈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호하고 잘 관리하라고 당부하신 영원한 이웃입니다. 저주도 복도 함께 해야할 우리의 영원한 반려가 자연입니다. 


우리는 보통 천국에 하나님, 천사, 구원 받은 성도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나라를 자연중심적으로 표현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11장 6절 이하입니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완벽하게 자연이 회복된 세계, 거기에서 우리가 영원히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 이하입니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여러분, 장차 가야 할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도 완전한 부활체로 변화하는 세계이지만, 자연도 완벽히 회복된 세계입니다. 환경도 완전하게 새로워진 세계입니다. 절대 오염이나 공해가 없는 나라, 수정 같이 맑은 푸른 바다, 푸른 나무가 있고, 다시는 어떤 저주도 눈물도 병도 없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구원 받은 성도가 영원히 더불어 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원히 살 세계는 절대 자연이 배제된 인간만의 세계가 아닙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러므로 자연과 환경은 우리의 요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앞장서서 관리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지금도 자연이 신음하며 회복을 고대하고 있다는 말씀을 새겨 듣고, 자연에 따뜻한 이웃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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