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9m 자백과 사죄(요일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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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m
요일 1:8-10
자백과 사죄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죄에 대해 얘기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다 죄인이라고 하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며 노골적으로 불쾌해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죄를 주제로 설교하면 거북해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시 죄인입니다. 다윗은 내가 죄 중에 잉태되고 죄악 중에 출생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의 의지나 행위와는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원죄, 유전 죄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담의 후예인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은 원죄입니다.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유전병을 물려받듯이 아담이 범한 원초적인 죄도 그렇게 우리에게 유전이 되기에 우리는 이미 모태 죄인으로 출생합니다. 태어난 후에도 죄를 지으며 삽니다. 이것을 자범 죄라고 합니다. 스스로 자기 행위로 의지로 범하는 죄입니다.
자범 죄는 왜 짓게 될까요? 왜 착한 생각, 선한 행위만 하면서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을까요? 우리가 다 원죄라는 죄성을 갖고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원죄 때문에 자범 죄도 불가항력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원죄라는 유전 죄를 갖고 태어나기에 죄인이고, 유전 죄 인자를 갖고 태어나 스스로 죄를 짓고 살기에 완벽한 죄인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밥 먹듯 죄를 범하며 삽니다. 그것도 몰라서가 아닙니다. 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짐짓 죄라고 부릅니다. 또한 죄가 좋아서, 즐기기 위해 계획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범하는 죄도 있습니다. 이것은 고범 죄입니다. 이래도 우리가 죄인이 아닙니까?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성경 말씀이 억울하고 불쾌하십니까?
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0절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원죄 죄인이고, 자범 죄 죄인이고, 짐짓 죄 죄인이고, 고범 죄 죄인입니다.
이렇게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19절입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 죗값을 대신하셨다는 것인데, 이것을 히브리말로는 <짜다크>, 헬라말로는 <디카이오>라고 하는 구속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씻겨서 깨끗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죄인은 죽고 의인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피를 바쳐 우리를 대속하셨다는 이 사실은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에 이제 우리가 더는 죄를 짓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날마다 죄를 밥 먹듯이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회의에 빠집니다. 우리가 얼마나 실망하고 좌절합니까? 내가 정말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오죽하면 바울 같은 사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내랴>며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은 대 사도가 된 후에 이렇게 괴로워했습니다. 거듭났으면, 사도가 되었으면 더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데,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왜 구속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게 될까요?
아무리 거듭났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우리가 성자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 금방 서거나 뛰게 되는 게 아니듯이,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 여전히 죄 짓고 여전히 엎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러나 비록 이전과 같은 죄를 범한다 해도, 이제는 죄의 성격이 다릅니다. 전에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세상이 부리는 대로 죄를 지으며 살았지만, 이제는 마귀와 세상이 조종해서가 아니라, 옛 사람의 습성, 관성 때문에 본의 아니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1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맞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옛 죄의 종이던 신분에 대해 죽었다는 뜻이지, 우리의 습성이 죽었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우리 몸에 죄악의 니코틴이 남아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하루에 두세 갑씩 피우며 살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무 자르듯 끊을 수 없습니다. 마귀가 강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 가락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제는 비록 죄를 범한다 해도 못난 신자요 나쁜 하나님의 백성일 뿐이지,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해서 다시금 옛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못난 자식이요 불효자일 뿐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지위 자체가 원인 무효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주랴고 하다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면서,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비록 죄를 지어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더는 정죄함을 받지 않으니까, 오직 하나님이 칭의, 곧 의롭다고 부르신다고 하니까, 지금까지는 두려워하며 죄를 지었는데, 이제는 안심하고 죄를 지어도 됩니까? 안 된다고 합니다. 로마서 6장 2절은 분명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받은 구원이 무효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의 지상과제인 성화를 그만큼 지체시키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모습을 내 삶에 익히는 훈련이 성화입니다. 죄가 내 구원을 해소시키지는 못하지만, 성화를 방해합니다. 우리가 왜 성화되어야 합니까? 그래야 훗날 천국에 가서 아무 문화적 충격 없이 적응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 거룩한데, 나만 거룩하지 못하면, 나는 영원히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만 영원한 별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비록 우리 구원은 해치지 못한다 해도 성화를 치명적으로 방해하기에, 정죄함이 없다 해도 절대 안심하고 죄를 짓거나 즐길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그럴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요 모순입니다. 죄가 아무리 우리의 성화를 지체시키고 성화를 해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준 처방은 요한복음 13장 4절 이하입니다. 주님이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세족식을 거행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절대 제 발을 씻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자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야지 선생님이 제자의 발을 씻길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발뿐 아니라 머리와 손도 씻겨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우리는 다 목욕한 자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온 몸을 씻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벽에 사우나를 다녀온 사람도 저녁에는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먼지 많은 세상에 나가면 금방 손발이 더러워집니다. 마찬가집니다.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사람도 세상을 살다보면 다시 죄로 더러워집니다. 전신을 씻을 필요는 없지만, 손발은 씻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성막 구조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막 뜰에 들어서면 그 한 가운데 번제단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각을 떠 제단 숯불에 고기를 태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뵈러 성소나 지성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제물의 피로 내 죄를 깨끗이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 성소로 들어가는데, 성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또 하나의 성물이 있습니다. 물두멍입니다. 물 담긴 대야입니다. 분명 번제단에서 희생제물의 피로 내 온 몸을 깨끗이 씻었는데, 다시 성소 앞에 이르면 물두멍에서 손을 씻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이 기물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지만,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번제단에서 성결케 된 자라도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다시 손의 먼지를 씻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손발을 씻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때그때 자기가 지은 죄를 자백하며 사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죄를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그때그때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사랑도 속으로만 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의 언어로 고백해야 하듯이 잘못도 죄도 속으로만 인정할 게 아니라 주님 앞에서 실토해야 합니다. 죄는 내 안에 품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해롭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몽땅 끄집어 내놓으면 주님이 깨끗이 처치하십니다.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라고 해서 죄 자백을 큰 성사로 여깁니다. 죄를 지으면 그때그때 사제에게 가서 지은 죄를 자백하고, 사제로부터 사죄 선언을 듣습니다. 그러면 다 해결됩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누구나 주님께 직접 자백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직접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십니다. 이게 발을 씻는 첫 번째 과정입니다.
다음은 내가 사죄 받은 사정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사죄란 우리가 말씀에 근거해서 확신을 하는 것이지, 느낌, 번쩍하는 신비체험으로 확증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반드시 우리 죄를 사하시며 깨끗케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영혼이 평온해집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든가 용서를 받든가 해야지, 속에다 넣어 놓으면 비겁해지고 초라해지고, 심리적으로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전혀 이로울 게 없습니다.
부디 자백을 통해 우리의 죄를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목욕한 사람도 손발을 씻어야 함을 기억해서 자백을 통해 깨끗하고 건강한 성도로 살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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