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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60515n 청년을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 (롬 8: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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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60515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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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롬 8:26-28</p>
<!-- paragraph:p0003 -->
<p class="p1">청년을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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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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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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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오늘은 성령강림절과 청년주일이 겹쳤습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lt;청년을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gt;으로 잡았습니다. 보혜사는 주님이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6장 7절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여기서 말씀한 보혜사가 성령입니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lt;파라클레토스&gt;입니다. &lt;파라&gt;와 &lt;클레오&gt;의 합성어입니다. &lt;파라&gt;는 ~ 곁에라는 뜻이고 &lt;클레오&gt;는 부르다는 동사입니다. 이 둘이 합쳐져서 명사형이 되었는데, 그 뜻은 &lt;곁으로 부름 받아 돕는 자&gt;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이 단어를 두 가지로 번역합니다. 어떤 성경은 &lt;카운슬러&gt;(counselor), 어떤 성경은 &lt;헬퍼&gt;(helper)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파라클레토스입니다. 내 안에서 나를 돕는 분이 성령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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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런데 주님은 성령을 &lt;또 다른 보혜사&gt;라고 하십니다. 주님도 이 땅에 친히 오셔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격려하고 도운 보혜사이고, 성령도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lt;또 다른 보혜사&gt;라고 하신 겁니다. 주님도 성령도 보혜사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든 인생의 삶이든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뜻입니다. 보혜사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바통 터치처럼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신 겁니다. 주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바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당부를 하셨을까요? 보혜사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혜사를 받고 그와 더불어 무언가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패는 보혜사와의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못 받으며 사는 성도만큼 불행한 신자는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야 하는데, 성령의 본업이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격려하고 돕는 것인데, 그 성령의 도움 없이 자기 혼자 꿋꿋이 살아가는 신자는 가장 불행한 신자입니다. 세상은 자기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결단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님을 보내주시고, 주님이 떠나시자 성령을 보내주신 겁니다. 그것도 영원토록 말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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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돕습니까? 신앙을 돕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안 도와주시면 신앙고백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2천 년 전의 예수를 어떻게 맨 정신으로 우리가 주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그렇게 만드셔야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이 깨닫게 하지 않으면 죄가 뭔지, 의가 뭔지, 심판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면, 그것은 모두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얼마나 갈팡질팡했는지 모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예루살렘에서 몇 번이나 뵙고도 낙향했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나 담대해졌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여전히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박멸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겁니다.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용기를 갖고 불덩어리처럼 살게 한 겁니다. 부디 늘 보혜사 성령의 도움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주님 오실 때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갈수록 믿음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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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기도를 잘 합니다. 기도할 때 청산유수처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성령이 탄식할 정도로 우리가 빌 바를 모른다고 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주님 뜻에 합당하고, 내게 필요한 것인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우리는 날마다 칼을 달라고 할 뿐입니다. 먹겠다고 뱀을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면 망할 게 뻔하기에 주님이 주시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기도를 안 들어준다고 투덜댑니다. 우리가 밤낮으로 구하는 품목을 살펴보십시오. 결국은 정욕에 따른 것, 나를 찌를 것만 구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대신에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왜 기도를 잘 하느냐면, 성령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분이 없고, 우리를 꿰뚫어보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이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가 왜 난장판으로 살아도 그나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성령이 탄식하며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중언부언, 횡설수설하지만, 성령님은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기도를 하십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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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삶을 돕습니다. 본문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성령이 내 삶을 돕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라 나쁜 일도 있고, 아름다운 일만 있는 게 아니라 욕된 일도 있습니다만,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궁극적으로 내게 유익하고 복이 되게 해주십니다. 성령이 도우시면 이것이 가능합니다. 어떤 환경, 조건, 여건도 아름다운 선으로 결말이 나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이하입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보배 곧 성령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겨쌈을 당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망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지키고 돕기에 세상이 우리를 아무리 우겨싸도 결국 우리는 싸이지 않고, 우리를 거꾸러 뜨려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했던 사도 바울의 간증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돕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지키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유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필히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성령 충만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의 반대는 이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마가복음 3장 28절 이하입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에베소서 4장 30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게 다 성령 충만의 반대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성령 충만이라고 하나 실제는 성령 소멸, 훼방, 근심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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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청년은 성령에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감동하실 때 민감히 반응하고, 계시하실 때 전폭적으로 결단하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겸허히 인정하고 성령이 내 안에 전적으로 지배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여러분의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독불장군으로 살면 안 됩니다. 보혜사 성령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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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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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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