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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0m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1-28)

20160410m

마 15:21-28

네 믿음이 크도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본문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틴 북부에 있는 지중해 해안 도시국가였습니다. 그곳은 주님이 주로 활동하시던 갈릴리와 멀지 않아서, 주님이 가끔 그곳에 가서 전도하셨는데, 이번에도 거기를 잠시 들르신 겁니다. 주님은 거기서 가나안 여인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여인이 주님을 향해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며 부르짖은 겁니다. 가나안은 원래 이스라엘 땅의 원주민이었으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쫓겨난 이방인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은 감정이 험악합니다. 결국 주님이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세상에 이런 찬사는 없습니다. 제자들도 들어보지 못한 말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무엇이든 네 소원대로 되리라.” 제자들은 믿음이 크다는 칭찬은커녕 툭하면 믿음이 없거나 작다는 책망만 들었습니다. 이방 여인이 주님으로부터 극찬을 듣고 큰 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바로 앞장인 14장 31절입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16장 8절도 보십시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책망만 듣던 제자들인데 이방 여인은 찬사를 들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28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주님이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신 그 순간 그녀의 딸이 나은 겁니다. 올해도 우리가 바라는 간절한 소원,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가나안 여인처럼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복의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절대 은혜를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거저 주시기에 은혜인데, 대가 없는 선물이기에 은혜인데, 은혜를 거저 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반드시 그 은혜를 감당할만한 채비가 되었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주십니다.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은혜가 화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꼭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복을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하신 후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복권에 당첨이 되지 않게 하시는 것은 그것이 도리어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가나안 여인에게 주님이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려면, 반드시 주님께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말씀과 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더 자주하셨습니다. 믿음이 주님의 은혜와 복을 헛되게 하지 않게 하는 그릇입니다. 믿음이란 그릇이 확인되어야 비로소 주님은 안도하시며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안기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것이 축복의 법칙입니다. 


주님의 시험을 어떻게 통과했기에 주님이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하셨을까요? 

가나안 여인은 주님의 침묵을 잘 참고 견뎠습니다. 22절 이하입니다.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주님을 뒤를 따라가며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아무리 큰소리로 외쳐도 주님은 한 말씀도 안 했다는 겁니다. 이보다 딱한 노릇, 이보다 더 답답한 경우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늘 우리가 기도하며 겪는 가장 일반적인 시험입니다. 나는 지금 절박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주님께 부르짖지만, 주님은 아무 반응도 없이 침묵하고 계십니다. 메아리가 없습니다. 이것처럼 힘들고 외롭고 절망스런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많은 사람이 이 첫 번째 단계에서 나가떨어집니다. 70-80%는 다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우리는 다들 조급해서 참거나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응답이 없으면 쉽게 체념하고 포기하여 기도를 접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당장 응답하셔야 하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진정성을 확인하시려고 언제나 최대한 침묵하십니다. 우리의 인내심, 진정성을 시험해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거기서 걸립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주님의 묵비권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포기하거나 체념, 실망하거나 낙담하여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소리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며 기도합니다. 이게 맞습니다. 주님의 기대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녀가 치러야 했던 시험은 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23절 중하반절입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제자들이 주님께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것도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수시로 겪는 시험이고, 아픈 시험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여리고 소경 바디매오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며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부르짖는데, 주님은 거기서도 대답이 없고, 제자들은 잠잠하라며 윽박지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측근인 제자들이니 누구보다 나를 더 자상하게 주님 앞으로 인도해주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니까 가장 헌신적이고 경건하고 사랑에 충만한 모습으로 나를 주님 앞으로 이끌어 주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놀랍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내 길을 가로막는 최대 걸림돌입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의 진로를 방해하는 최대 훼방꾼이 제자들입니다. 목회자들이 여러분의 최대 난적입니다. 친절하게 여러분을 주님께로 이끄는 가이드가 아니라 불행하게도 목사들이 여러분의 천적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벽을 넘어야, 목사들의 방해나 훼방을 극복해야 그 너머에 계신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정은 더욱 그렇습니다. 목사가 사기치고, 목사가 자기 딸을 때려 죽여 그 시신을 자기 방에 11개월이나 유기하고, 목사가 정선 카지노에 드나들고, 목사가 교회 돈 600억을 횡령해 피소되고, 목사가 장애아동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고... 이래도 목사가 성도들의 최대 난적 아닙니까?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 성도들은 이 가혹한 목회자의 훼방을 극복하지 못하면 누구도 주님을 뵙고 소원을 이루는 일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대개는 이 교회에서 목사에게 상처 받으면 피를 흘리며 저 교회로 옮깁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악랄하고 무서운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50개, 60개 교회를 전전하다 결국은 요즘 유행하는 가나안 성도가 되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침묵은 약과입니다. 제자들의 횡포가 더 치명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자들의 역기능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 목사들의 악랄함에 실망하여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여리고 소경 바디매오도 마찬가집니다. 그는 제자들의 훼방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 붙잡고 시비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들의 집요한 방해공작에 말려들지 마시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상대하십시오. 여러분, 내 신앙에 장애가 되고 가시가 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상처 받지 마시고, 시험에 들어 낙심천만하지 마시고, 그 제자들 너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며 악착같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물론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게 되지, 그들 너머에 계신 주님께 내 눈을 고정하기가 말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게 살 길입니다. 가나안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는 그랬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성공했고,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이 당한 시험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더 무서운 시험이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주님의 거부와 모욕이었습니다. 24절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26절도 보십시오. “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사실 이 시험이 가장 무섭고 절망적이고, 난이도가 가장 높은 치명적인 시험입니다. 이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험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씀도 안 하던 주님이 ‘나는 오직 이스라엘 사람만을 위해 보냄을 받았으니 이방인은 내 소관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여인이 나를 도와달라고 하니까, 주님은 도저히 참기 어려운 모욕적인 말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어찌 개에게 던지겠느냐?’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이방인을 개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인은 잡혼을 한다고 해서 개라고 불렀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원색적인 욕입니다. 이쯤 되면 극도로 맘이 상해 욕이나 저주를 퍼붓고 그냥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펄펄 뛰며 구원이고 뭐고 다 둘러엎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든 내 자존심을 도발하면 못 참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주님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었으나 거기에 맞장구를 치면서, 개가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듯이, 제발 이 천하고 불쌍한 개인 제게도 부스러기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러분, 정말 주님의 은혜를 바라고 사모하십니까? 주님 앞에서 이 가나안 여인처럼 자신을 완벽히 내려놓으십시오. 자신을 완벽히 비우십시오. 주님 앞에서 아직도 자기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은 은혜 받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며 부디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해야 주님이 감동하십니다. 


이렇게 주님 발 앞에 납작 엎드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저는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 이방의 개입니다고 하며 부스러기 은혜를 청한 그 여인에게,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다. 내가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심한 말을 했다. 너야 말로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 내가 졌다. 네가 이겼다. 무엇이든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이 여인에게 은혜를 받은 겁니다. 한 번도 그 누구도 주님을 이렇게 감동케 한 적은 없습니다. 주님의 침묵에 인내하고, 제자들의 훼방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심한 모욕에도 끝까지 겸손하게 엎드린 이 모든 게 다 그녀의 믿음에서 나온 사실임을 주님이 인정하셨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자 그 시간에 그녀의 딸이 낫습니다.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안고 주님을 떠났다면, 딸은 고사하고 평생 지울 수밖에 없는 상처 외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정말 주님의 은혜를 바라신다면, 올해는 꼭 주님의 모든 시험을 통과하십시오. 그 시험을 통해 믿음이 확인되어야, 은혜를 감당할 만하다고 검증이 되어야,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올해는 여러분 모두 가나안 여인처럼 주님의 칭찬과 함께 마음의 모든 소원을 이루는 복 있는 성도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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