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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60403m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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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20160403m</p>
<!-- paragraph:p0002 -->
<p class="p1">막 16:1-8</p>
<!-- paragraph:p0003 -->
<p class="p1">치유와 회복을 위하여</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p>
<!-- paragraph:p0006 -->
<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잘 아시는 대로 우리에겐 성경의 원본이 없습니다. 가장 최초의 기록이고 편집이고 제본인 오리지널 성경은 없고 모두 사본입니다. 또한 그 사본을 다시 베낀 필사본만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사본일수록, 초기에 필사한 사본일수록 사본으로서의 권위나 가치가 높습니다. 이 시점에서 가장 오래된 사본은 4세기에 필사된 양피지 사본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사본도 있습니다만, 그것들은 주로 파피루스 사본들이어서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파피루스는 갈대로 만든 종이입니다. 파피루스 사본들은 조각 난 사본들입니다. 그래서 사본으로서 가치가 좀 떨어집니다. 양피지 사본들은 그 내용들의 상태가 완전하고 양호합니다.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들은 현존하는 사본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양피지 사본들입니다. 내용이나 상태가 양호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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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4세기 사본에는 마가복음 16장 9절 이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까지만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진 성경에 9절 이하 20절까지가 들어 있습니까? 훨씬 후대의 사본인 7, 8세기 사본에는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20절까지를 큰 괄호로 묶어놨습니다. 거기에 각주를 달아놨는데, 그 내용은 어떤 사본에는 9-20절까지는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사본이란 바로 초기 사본, 4세기 사본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되고, 다른 복음서가 기록될 때 1차 자료로 사용된 마가복음에는 16장 9절 이하가 없습니다. 천사가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 주님의 약속을 전해주는 것으로 마가복음이 끝난다는 겁니다. 이게 마가복음의 피날레입니다.</p>
<!-- paragraph:p0010 -->
<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그러면 왜 갈릴리입니까? 좌절한 제자들과 여인들이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왜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십니까? 마태복음 28장 7절입니다. “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인 이유가 뭘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치유와 회복 때문입니다. </p>
<!-- paragraph:p0012 -->
<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예루살렘은 대결의 장소이지 힐링의 장소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야합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곳입니다. 죽음이 삶을 조롱한 곳입니다. 만약 주님이 예루살렘 어디선가 만나자고 하셨다면, 분노에 가득찬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제 드디어 보복하나 보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대결, 분노, 투쟁의 장소 예루살렘이 아닌 저 먼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겁니다. 그러면 갈릴리란 어떤 곳입니까?</p>
<!-- paragraph:p0014 -->
<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주님이 3년 전에 처음 제자들과 만나신 첫 사랑의 장소입니다. 갈릴리는 대립, 싸움, 분열, 증오, 죽음 이전의 장소입니다. 사랑과 복종과 신뢰만이 지배하던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 겁니다. 거기에서 주님이 제자들의 상처를 회복케 하고 첫 사랑을 상기하도록 한 겁니다. 당시 제자들은 심신이 완전히 무너져있었습니다. 모두가 트라우마를 안고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위기에 처한 부부가 그들이 처음 만나 프로포즈를 했던 그 장소를 찾아가 회복하듯 주님도 그것 때문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 겁니다. 성경은 첫 사랑, 첫 소명, 초심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처음 뜻에 변함이 없고 한결 같은 분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은 우리를 첫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주님께는 우리가 다 첫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 사랑을 잃어버리면 크게 실망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 이하입니다.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첫 사랑을 잃은 에베소교회에 대한 주님의 준엄한 충고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첫 사랑을 잃었는지를 살펴 회개하고 첫 사랑을 되찾으라는 겁니다. 앤소니 퀸이 주연했던 &lt;바라바&g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라바는 주님 대신 유월절 특사로 풀려난 사형수였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송사하니까 빌라도가 정치적 협상을 꾀해 일단 예수를 유죄로 봅니다. 대신 유월절 특사로 예수를 석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특사로 석방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졸지에 풀려난 사형수가 바라바입니다. 영화에서 바라바는 특사 석방된 후에 처음에는 주님을 열심히 믿고 증거합니다. 그러나 심한 박해와 핍박이 덮치자 신앙을 버립니다. 그러면서 자위하기를 일단 지금은 예수를 배신하고 박해 후에 그때 잘 믿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주님을 버립니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많은 목회자가 목회를 하고 있는 이유는 뜻밖에도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벌 받을까봐 목회를 붙잡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첫 사랑, 첫 소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첫 사랑의 성지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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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7 -->
<p class="p1">마가복음은 일단 여기서 끝납니다만,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그 이후의 장면이 잘 나옵니다. 갈릴리로 낙향한 제자들이 옛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 밤새 그물을 던져보지만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허탈해서 깊은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주님이 거기에 나타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셔서 그렇게 했더니 도저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3년 전 그들이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와 똑같습니다. 그때도 주님이 거기에 나타나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도 고기가 많이 잡혀 두 배에 가득 찼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이 ‘이제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시며 제자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지금도 주님이 3년 전 첫 소명 때와 똑같은 설정을 하셔서 다시금 그들의 소명을 일깨우십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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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9 -->
<p class="p1">그 다음 장면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이 숯불가에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첫 사랑의 현장에서 주님이 처음 사랑, 초심을 확인하고 계신 겁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물으십니다. 왜냐면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짚 뜰 숯불 가에서 주님을 모른다며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그 뼈아픈 실패와 아픔을 주님이 어루만지시며 다시금 첫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해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며 묻고 확인하신 겁니다. </p>
<!-- paragraph:p0020 -->
<p class="p2"><br></p>
<!-- paragraph:p0021 -->
<p class="p1">그런데 요한복음 21장 15절을 보면, 주님이 그냥 물으신 게 아니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그런데 이 구절에 각주가 붙어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이것들”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거기 있던 사람들을 가리키겠지만, 만약 “이것들”에 초점을 맞추면,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물고기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누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많은 물고기보다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p>
<!-- paragraph:p0022 -->
<p class="p2"><br></p>
<!-- paragraph:p0023 -->
<p class="p1">우리는 주님의 이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이 사람들보다, 이것들보다 더 사랑하는 줄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제서야 주님이 안도하시며 ‘네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베드로의 처음 사랑, 초심을 회복시키고, 첫 소명도 회복시킨 겁니다. </p>
<!-- paragraph:p0024 -->
<p class="p2"><br></p>
<!-- paragraph:p0025 -->
<p class="p1">결혼한 지 20년이나 된 부부가 아직도 남편이 퇴근해 돌아오면, 눈물을 글썽이는 아내가 있다면 좀 이상한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렇게 순수하고 살뜰하게 하는 사랑이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바로 이것을 주문하십니다. 늘 첫 사랑같이 설레고 두근거리고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무덤덤하게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실망하십니다. 초심을 회복합시다. 처음 사랑, 처음 열정, 처음 소명을 되찾읍시다. 부디 모두가 자기 만의 첫 사랑의 장소로 가서 뜨거운 감격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하고, 싸늘하게 식은 가슴을 다시 데우고, 처음 사랑을 다 회복해서 주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소명, 달란트도 새롭게 깨달아 다시 한번 새출발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p>
<!-- paragraph:p0026 -->
<p class="p1"><br></p>
<!-- paragraph:p0027 -->
<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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