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0m 천국을 훔친 강도(눅 23:39-43)
읽기 설정
미리보기 인용
복사되는 내용은 인용 정보와 미리보기 주소다.
현재 미리보기 주소:
20160320m
눅 23:39-43
천국을 훔친 강도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처형된 골고다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가운데는 주님이 달리셨고, 좌우 양쪽엔 강도가 달렸습니다. 디고데모복음, 혹은 빌라도행전이라고 고도하는 책에 보면, 강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다이스마스와 가이스입니다. 이 둘은 사촌간인데, 온갖 못된 짓을 하다가 살인혐의로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원래 십자가형은 자기의 형틀을 지고 형장까지 가야합니다. 그 형장으로 가는 길이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입니다. 안토니오 요새에서 골고다까지는 1.5km 정도의 거리입니다. 주님은 몇 번이나 쓰러지셨는데, 마지막엔 일어나지를 못하자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여 골고다에 이릅니다. 두 강도는 골고다에 오르기까지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세상을 저주했고, 심지어 예수님까지 욕했습니다. 마태복은 27장 44절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가복음 15장 32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오늘 본문 39절도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이러면서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조금 전까지도 욕하고 저주하며 주님을 비웃던 한 편의 강도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러니까 동일선상에 선 두 강도가 같은 죄를 범하고도 하나는 마지막 순간에 극적인 회개로 천국 갔고, 다른 한 강도는 끝까지 저주를 퍼붓다가 지옥에 갔다는 얘깁니다. 천국과 지옥의 영원한 기로에 십자가가 서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기막힌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분수령이요, 시금석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세상에서 죄를 범하며 살지만, 어떤 이는 회개하고 천국에 가고, 어떤 이는 끝까지 조롱하다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노아 홍수에 비유합니다. 노아 홍수는 본래 목적은 하나님이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었던 자들에게는 구원의 표였습니다. 믿고 십자가 앞에 나오면 살지만, 십자가가 구원의 표상이 되지만,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배척하면 그 십자가로 인해 영원히 멸망합니다.
한 편의 강도를 보십시오. 이 사람은 철저히 마이너스 인생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랑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산 적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조금 전까지도 욕하던 그 입으로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 뿐인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구원의 약속을 받아냅니다. 이 사람은 마지막에는 천국까지도 훔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암암리에 이 강도를 부러워합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보장만 있으면 평소에는 좀 맘대로 살다가 구원받기 직전에 회개하고 천국 가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괜히 젊어서부터 예수 믿어 피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강도야 말로 가장 저렴하게 천국 간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옥 가지 않고 천국행 막차를 탔다는 건 행운이요 다행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왜냐면 천국에서 누릴 것은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천국행 막차를 탄 사람은 천국에 가도 영원한 부끄러움을 면치 못합니다. 본문의 이 강도처럼 마지막에 한 건 잘해서 천국 가는 사람은 거기에 가서도 누릴 영광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4절 이하입니다.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이 땅에서 세운 공적이 많으면 훗날 천국 가서 받을 보상이 많지만, 세운 공적이 없으면 구원은 받으나 마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다고 합니다. 불난 집에서 겨우 구조된 사람을 보십시오. 목숨은 건졌으나 꼴은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세운 공적이 없어 훗날 천국에서 받을 상급이 없는 사람은 불 가운데서 구원 받은 사람처럼 부끄러운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강도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복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한편 강도가 부끄러운 구원이나마 가능케 하는 회심을 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다른 강도와 함께 여전히 세상을 저주하고, 주님을 욕하던 그 사람이 어떤 계기로 한 순간에 변해 주님께 구원을 청했느냐는 것입니다. 수수께끼 같습니다. 이 강도는 다른 강도보다 좀 더 착해서 그렇습니까? 이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개념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강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기에 죽기 3초 전이었지만 회개하고 천국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비록 살인 강도였을망정, 그 사람은 택하신 백성이기에 주님이 최악의 순간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강제로 회개시켜서 그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한편 강도만이 아니라 실은 오늘 우리도 같은 케이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어떻게 해서 천국을 약속 받은 것입니까? 회개했기 때문입니까? 남이 갖지 못한 회개, 믿음을 어떻게 갖게 되셨습니까? 남보다 좀 더 잘 나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어쩌면 남보다 더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님께 천국을 약속 받은 것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일방적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주권적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믿어 구원을 얻은 게 아닙니다. 이미 택함을 받았기에 주님이 나의 믿음을 강제하신 겁니다. 택함을 받았기에 주님이 나의 회개를 강제하신 겁니다. 택함을 받았기에 주님이 나의 천국행을 강제하신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내가 믿어서, 회개해서가 아닙니다. 내 동의 없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이 강도와 가장 대조되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역시 막판에 주님을 배신하고 자살해서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보면 가장 깊고 어둡고 뜨거운 곳에 가 있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어떤 케이스입니까?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의 사도가 되었는데, 결국 마지막으로 타락하고 배신해서 제9지옥으로 떨어진 사람입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도, 마귀도, 사탄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낼 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결코 믿음에 실패해서, 신자가 타락해서, 사도가 주님을 배신해서 버림 받고 저주받은 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얻지 못한 가라지였습니다. 처음부터 양이 아니라 염소였습니다. 알곡 사이에 있다가 마지막에 불구덩이에 던져진 가라지였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지옥 갈 일은 없습니다. 이 강도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기에 그 마지막 순간이라도 회개하고 천국 가게 하신 겁니다.
택한 백성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부끄러운 꼴로 천국에 가는 비극을 피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천국 백성으로 택하셨을 뿐 아니라, 일찌감치 불러주셔서 훗날 천국에 가서 누릴 영화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본인이 결단하기에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은혜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기도도 할 수 있고, 말씀도 볼 수 있고,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더욱 세월과 건강을 아끼며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죄를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원문 자료와 첨부
- 미디어: YouTube 시청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