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3m 주님의 저주(막 1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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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3m
막 11:12-25
주님의 저주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예루살렘 가두의 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난주간 월요일 아침, 예수님이 성 밖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시장기를 느끼셨습니다. 길가의 한 무화과나무에 다가가 열매를 찾았는데 없었습니다. 원래 길가의 무화과나무는 나그네들을 위한 것입니다. 실망하신 주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이튿날 아침 주님의 일행이 다시 그곳을 지나가는데, 어제 그 나무는 이렇게 됩니다. 20절 이하입니다.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사실 이 사건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선 주님의 이미지와 잘 안 어울립니다. 주님의 은혜, 사랑, 축복이라고 하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저주라고 하면 낯설고 부자연스럽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이적을 보십시오. 다 살리고, 고치고, 회복시키는 것들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온전케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등의 희망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졸지에 그 뿌리까지 말라죽게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나무를 저주해서 죽인다는 것은 평소 주님의 성품이나 정서에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단 한 번도 자신의 필요 때문에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고도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마귀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건은 배고파 열매를 찾다가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황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그때는 계절상 무화과가 달릴 시기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었다는 겁니다. 제 철도 아닌 무화과나무에게서 열매를 찾으셨고, 당연히 열매가 없음에도 그 이유로 저주해서 뿌리째 말라죽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겁니까? 설마 주님이 배고파 이성을 잃으셨거나 무화가 철을 잘못 아시고 실수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히 주님이 시장하셔서 우발적으로 범하거나 벌인 헤프닝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된 퍼포먼스였을 겁니다. 애꿎은 무화과나무를 희생양으로 삼아 뭔가 주님이 전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있어 고의적으로 연출하신 사건일 개연성이 높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 사건에는 열매는 하나도 없으면서 잎사귀만 무성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야말로 잎사귀뿐이었습니다. 잎사귀로 자신을 가리고 치장했지, 어디에도 주님이 바라시고 기대한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그들에게 생생한 경종을 울리신 겁니다. 주님이 그들에게서 찾은 열매는 대체 무엇입니까?
예배의 열매였습니다. 15절 이하를 보면 주님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곧장 예루살렘 성전으로 직행합니다. 거기에서 돈 바꾸는 자와 짐승을 몰아내며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비둘기, 양, 돈은 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바치는 제물이요 헌금을 가리킵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그것을 다 몰아내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예배가 타락하고 장삿속으로 변질되었다는 뜻입니다. 성전은 크고 화려했습니다. 예배는 거창하고 제물은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무성한 잎사귀일뿐 정작 필요한 열매는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주님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셨겠습니까? 주님이 진정으로 원한 예배는 비둘기나 양, 돈을 바치는 제사가 아닙니다. 내 몸, 내 삶, 내 존재를 바치는 제사입니다. 그게 산 제사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영적 예배입니다. 짐승만 바치는 제사는 죽은 제사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돈을 바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내 존재, 삶, 믿음, 사랑을 담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진정한 헌상입니다. 그럼에도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은 양과 염소와 비둘기만 바칠 줄 알았지 자기 몸을 바칠 줄은 몰랐기에, 그들의 예배는 언제나 잎사귀만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형식이 아닙니다. 내용입니다. 예배는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내 존재를 헌상하는 결단입니다. 잎사귀가 아니라 열매를 바치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주님은 결코 잎사귀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보다 진실하고 정직한 예배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였습니다. 22-23절입니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체, 경건한 체 하는 위선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새삼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고,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하신 겁니다. 우리는 불도저나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만 우리 앞에 놓인 저 산과 바위를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많은 산들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엇으로 저 산들을 들어 바다에 던지시겠습니까? 명심하십시오. 믿음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무성하고 요란하고 그럴 듯한 잎사귀 말고 오직 참된 믿음의 열매를 맺읍시다. 요한복음 15장 8절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올해도 믿음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형식적인 기도 말고, 중언부언하는 기도 말고, 입으로는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는 응답될 것이라 믿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기도 말고, 반드시 믿고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 진정한 기도생활의 열매를 맺으라는 겁니다. 주님 당시 유대인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주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시장통이나 큰 거리에서 기도했습니다. 또 슬픈 표정을 짓고 티를 내면서 금식했습니다. 기도조차도 철저히 외식이었습니다. 기도마저도 잎사귀만 무성했지 참된 열매는 없었습니다. 주님이 당부하신 기도를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 구하기만 했지 아직 받은 게 아닌데, 이미 받은 줄로 확신하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기도입니다. 이것이 응답받는 기도의 진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은 종달새 알에서 이미 종달새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엘리야처럼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며 이미 귀로는 세찬 빗소리를 듣는 게 믿음의 기도요 선제적 기도입니다. 받기도 전에 받은 걸 감사하라는 겁니다. 거기에 기도 응답의 풍성한 열매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놀랍게도 믿음이 아니라 불신으로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기도가 실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반신반의하거나 혹시나 하는 기대로 하는 겁니다. 응답이 되면 다행이고, 응답이 안 되어도 별 수 없다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나 확신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불신과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러분,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열매에 목말라 하십니다. 우리의 열매에 허기져 계십니다. 그래서 늘 내게서 열매를 찾으십니다.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보람을 드리는 열매를 맺읍시다. 예루살렘 가두의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를 기억하십시오. 얼마나 잎사귀가 무성하고 때깔이 고왔습니까? 얼마나 훌륭한 신자처럼 보이고 줄기에 든든히 붙어있는 가지처럼 보였습니까? 그럼에도 실은 열매가 없었고 잎사귀뿐이었습니다. 더는 잎사귀로 자신을 치장하지 맙시다. 잎사귀로 자신을 가리며 시장하신 주님을 속이지 맙시다. 십자가를 앞두고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서까지 실물로 경고하신 주님의 메시지를 새겨들읍시다.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기대에 충실히 부응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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