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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60228m 주님의 눈물(눅 19: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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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20160228m</p>
<!-- paragraph:p0002 -->
<p class="p1">눅 19:41-44</p>
<!-- paragraph:p0003 -->
<p class="p1">주님의 눈물</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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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우리는 흔히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히려 우는 자가 복되다고 합니다. 산상수훈에도 8복을 보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실제 복음서를 보면 주님은 웃으셨다거나 웃기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여러 번 나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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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41절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다가 감람산까지 오셔서 거기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셨다는 겁니다. 주님이 왜 우셨습니까? 이때 흘린 주님의 눈물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민족의 장래가 안타까워 흘린 애국애족의 눈물입니다. 42절입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오늘은 사순절 셋째주일인데 삼일절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만, 이스라엘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았습니다. 우리처럼 이스라엘도 주전 931년에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습니다. 그 분단된 남북이 다시 바벨론과 앗수르에 각각 망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사실상 한 번도 독립국가를 이뤄보지 못하고 바사, 헬라, 로마 식민지를 거쳐 주님 시대까지 이르렀는데, 그 기간이 무려 1000년입니다. 그뿐입니까? 본문 43절 이하입니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 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그 그림을 먼저 내다보시며 안타까워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완벽하게 포위를 당하고 어린 자식들이 땅에 패대기쳐지고, 마침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예루살렘 성이 완벽하게 훼파될 것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서 쏘는 핵폭탄을 남한이 맞으면 바로 이처럼 될 것입니다. 주님이 그 비극적인 이스라엘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시며 우셨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는 국경이 없습니다만, 기독교 신자에게는 엄연히 조국이 있습니다. 주님도 당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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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본문을 마태복음 23장에서 보면 더 처절합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면서 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일찍이 3.1운동을 주도했던 초기 우리나라 성도들처럼 민족을 끌어안고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실 평화를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평화가 주어질 것인지에 관한 생각이나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당신은 내일 모레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예루살렘은 평화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제가 볼 때는 6.25 이후 우리나라의 평화가 가장 위태로운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주님처럼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만 자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쯤에서 서울을 바라보신다면, 똑같이 우시며 탄식할 것입니다. 원수들이 우리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우리 자식들을 땅에 패대기치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한 최악의 비극이 이르지 않도록 이 나라의 안보와 평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울며 기도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신자요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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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윈스턴 처칠의 전기에 보면, 2차 대전이 한창 일 때, 국회에서 파병문제로 의원들 간에 열띤 토론이 이뤄짐에도 처칠 수상이 앞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었습니다. 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며 호통을 쳤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달린 시점에 수상이 졸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처칠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아니 졸다니요 저는 기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중요한 순간에 기도 안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처칠이 정말 그때 기도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야말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부디 주님처럼 눈물을 흘리며 나라의 안보를 위해 기도하시는 복 있는 성도,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더욱 책임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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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15 -->
<p class="p1">주님은 언제 우셨습니까? 나사로가 죽었을 때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2절 이하입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것은 무슨 눈물입니까? 형제에 대한 동정의 눈물입니다. 불행당한 이웃에 대한 연민의 눈물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눈물입니다. 따라서 이 눈물도 신자가 흘려야 할 값있는 눈물입니다. 요즘은 믿는 사람도 마음이 얼마나 둔탁해졌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무심한지 이웃의 불행을 봐도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드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입니다. “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여기 나오는 말세의 현상 가운데 &lt;무정하다&gt;는 말씀은 문자 그래도 눈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웃의 불행을 봐도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메마른 사회가 종말이라는 겁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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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일하는 직업 종교인 레위인도, 성직자인 제사장도, 강도 만난 자를 보고 피해서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응급조치 후 나귀에 태워 주막까지 데려가 돌보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주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도 이같이 하라!’ 옛날에 비해 지금은 우리 주변에 강도 만난 사람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피해 멀리 달아나기 바쁘고,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애써 외면하기 바쁘지, 주님이 당부하신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연민의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베풀지 않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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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요즘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눈물뿐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의 눈물도 고갈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막달라 마리아를 눈물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부를까요?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시신에 바를 향유를 갖고 주님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무덤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빈무덤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초대교부 터툴리안은 만약 거기에서 주님이 마리아야 하고 불러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거기서 영원히 울고 있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계속해서 보면,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지만, 그녀는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그곳 동산지기인 줄 알고, ‘시신을 치웠다면 어디에 두었는지 일러주십시오. 내가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연민이 깊었으면 주님의 시신을 찾습니까? 주님이 다시 마리아야 라고 부르시니 그제서야 마리아가 주님을 알아보고 와락 안기려고까지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활 후 제자들보다도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녀를 두고 사도 중의 사도라고 합니다. 우리도 주님에 대한 순수한 동정의 눈물, 이웃을 위한 사랑의 눈물을 회복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감성이 풍부해야 영성이 메마르지 않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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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주님은 또 언제 우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 우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힘써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고만 했는데, 히브리서 5장 7절을 보면 주님이 이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합니다. 주님이 이때 피눈물을 흘리신 겁니다. 이 눈물을 어떤 눈물입니까? 이 눈물이야 말로 가장 종교적인 눈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흘린 눈물, 우리의 대속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눈물이 이것입니다. 속죄, 회개, 참회,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운명을 위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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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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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사죄를 빌며 울어본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요즘은 회개하며 우는 사람을 보기가 참으로 힘들어졌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기도할 때마다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요즘 성도들의 눈은 뽀송뽀송합니다. 요즘은 죄 안 짓습니까? 우리는 옛날보다 더 기름진 죄, 세련된 죄, 더 고급스런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런데도 회개의 눈물을 흘릴 줄은 모릅니다. 우리가 지금 그만큼 강퍅해져있고 뻔뻔스러워졌고, 더 주님 앞에서 철면피로 삽니다. 주님 앞에서 울지 않는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만큼 더 타락하고 세속화 되고, 신앙 양심이 둔감해졌고, 무감각해졌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너무 울어서 눈이 상했다고 했고, 침상이 썩었다고 했습니다. 내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라고까지 했습니다. 다윗은 성자요 성군입니다. 당장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고 하십니다. ‘내가 네 생명을 15년 연장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가 주님의 심금을 울린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도에 가장 약합니다. 하나님은 감성을 지닌 신입니다. 우리가 울면 하나님은 가슴이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눈물의 기도가 호소력이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가진 예레미야는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심판을 결정하셨을지라도, 우리가 눈물을 강처럼 흘리면 그 심판을 철회하신다는 겁니다. </p>
<!-- paragraph:p0024 -->
<p class="p2"><br></p>
<!-- paragraph:p0025 -->
<p class="p1">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하지만, 내 가족, 자녀, 부모를 위해서도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주님은 골고다 길을 뒤따르던 여인들을 향해 ‘여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코가 석 자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와 너희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슬퍼하기보다 우리 자녀의 구원을 위해 우는 일이 급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자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생활 제대로 합니까? 지금도 주일 성수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들의 구원과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위해 얼마나 우셨습니까? 주님이 지금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혼미한 상황에서도 울며 따르는 여인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씀의 엄중함을 결코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도 눈물의 기도로 키운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식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더욱 많은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서, 남편과 아내의 구원을 위해서도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주님처럼 그렇게 구속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야말로 믿는 자에게 주어진 소중한 책무요 사명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더욱 많이 여러분 자신의 눈물샘을 자극해서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눈물로 주님의 심금을 울리는 복된 성도가 되십시다. </p>
<!-- paragraph:p0026 -->
<p class="p1"><br></p>
<!-- paragraph:p0027 -->
<p class="p1"><br></p>
<!-- paragraph:p0028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2h59oQc47-A"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