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14m 마라와 엘림(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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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4m
출 15:22-27
마라와 엘림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본문 앞장인 출애굽기 14장의 내용은 홍해 도하입니다. 그러고 나서 15장이 이어지는데, 구성을 보면 1-18절까지는 모세의 노래이고, 19-21절은 미리암의 노래입니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입니다. 당연히 홍해 도하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노래입니다. 앞은 검붉은 홍해가 가로놓여 있고, 양쪽은 온통 무시무시한 바위산들입니다. 뒤에서는 성난 애굽의 전차부대가 바짝 뒤쫓고 있습니다. 절체절명, 사면초가입니다. 바로가 마지막 장자 재앙에 굴복해 히브리 노예들의 출애굽을 허용했는데, 그들이 떠나자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차부대를 보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지막 순간에 모세를 통해 극적으로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 한가운데 큰 길을 내사,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홍해를 도하하게 하시고, 애굽 군대는 그들의 눈앞에서 다 수장하셨습니다. 14장 27절 이하입니다.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현장에서 이 장면을 지켜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통쾌했겠습니까? 그래서 15장 1-21절까지 기쁨의 노래를 부른 겁니다.
그런데 22절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22-23절을 다시 봅니다.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고, 그들을 뒤쫓던 애굽 군대가 수장되는 걸 목격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노래를 부를 때는 좋았는데, 불과 사흘 만에 물이 없어 고통을 겪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마라에서 샘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다들 안도하고 환호를 올렸는데, 그 물이 짜다 못해 쓰디 쓴 물이었습니다. 그런 물은 비상과 같아서 마시면 복통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마라는 쓰다라는 뜻입니다. 룻기 1장 20절을 보면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이제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했습니다. 각주를 보면, 나오미는 기쁨과 희락이고 마라는 괴로움이라 적혀 있습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자마자 백성들이 마라의 쓴 물 때문에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세상살이입니다. 홍해도 마라도 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입니다. 그렇다면 왜 홍해의 감격을 좀 더 오래 누리게 하지 않고 불과 사흘 만에 마라의 쓴 물을 만나 고통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여러분 주변에 한 때는 홍해를 건너고 애굽 군대의 멸망을 지켜보며 신나게 잘 나갔는데, 지금은 인생의 쓰디 쓴 물을 마시며 좌절하고 절망하는 분들 안 계십니까? 여러분, 마라의 쓴 물은 무엇일까요? 우리 삶에서 마라의 쓴 물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25절 하반절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 뒤쫓던 적이 수장되어 통쾌한 승리를 맛볼 때뿐만 아니라 목이 갈하고 쓴 물에 고통당할 때도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마라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극심한 기갈과 쓴 물, 쓴 잔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왜냐면 우리가 평안할 때는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오고 쓴 물을 마실 때 비로소 그 진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 풀리고 승리할 때는 나는 기쁘다며 방방 뜹니다. 그러나 사흘 길을 가도 물이 없고 마라에서 겨우 찾은 샘물마저도 쓴 물일 때는 당장에 본성을 다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24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를 원망했다는 얘기는 곧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뜻입니다. 마라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는 데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 시험에서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광야같은 세상을 살다가 마라를 만날 때 잘 하셔야 합니다. 내 인생의 쓴 잔이 다가왔을 때, 추한 인간성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믿음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은혜를 입고 복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모든 게 잘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만큼 오해도 없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인생에 쓴 잔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전에는 없던 문제가 마구 새롭게 생깁니다. 내가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시려고 하나님이 고의로 이런저런 시험을 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 판판이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번 만이 아니라 이미 사흘 전 홍해 앞에서도 모세를 있는 대로 원망했습니다. 14장 11절 이하를 보면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로 끌어내어 죽게 하느냐,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낫다’고 하면서 원망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겨울에 길을 가다 눈길에 미끄러져도 당장 눈을 하얗게 뜨고 이제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신다고 원망합니다. 기도하다 조금만 응답이 늦어도 혼자 좌절했다가 실망했다가 체념했다가 생난리를 피웁니다. 마라의 쓴 물을 마실 때, 하나님 원망하지 마십시오. 쓴 물 앞에서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예의주시하는 주님께 실망을 안기지 마십시오. 반드시 믿음으로 반응하셔야 합니다.
마라의 쓴 물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입니다. 26절 하반절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나님이 당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로 계시한 사건이 마라의 쓴 물입니다. 치료하는 여호와는 여호와 라파입니다. 여호와 라파를 계시한 사건입니다. 당신이 곧 여호와 라파임을 계시하기 위해 연출한 사건이 마라의 쓴 물입니다. 쓴 물로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당장이라도 어떻게 할 기세입니다. 모세가 하도 기가 막혀서 하나님께 토로하자, 한 나무를 지시하시며 저 나무를 쓴 물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 쓰디 쓴 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신 말씀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한 사건을 통해 자신이 치료하는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의 병든 육체, 황폐해진 정신과 영혼, 우리의 비뚤어진 인격과 정서, 우리의 열악한 삶의 조건과 환경, 우리의 망가진 가정, 빗나간 운명도 다 고치고 새롭게 하는 여호와 라파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키십니까?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한 나무로 그렇게 하십니다. 모든 나무가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이 가리키신 한 나무입니다. 하나님이 특정하신 한 나무가 어떤 나무입니까? 베드로전서 2장 24절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이 달리신 골고다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나무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나무가 쓰디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켰습니다. 십자가가 고치고 살리고 새롭게 하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수난기사를 보면, 한 가지 재미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주위에는 온통 마리아 천지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마태복음 27장 55절 이하입니다.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리아는 사실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단지 흔한 이름이어서 십자가 주위에 마리아의 이름이 널린 게 아닙니다. 계시의 뜻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의 뜻은 성스럽지 않습니다. 뜻밖에도 마리아가 마라입니다. 마라의 파생어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뜻이 쓴 것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마리아의 한복판에 십자가가 섰습니다. 그러니 마라의 쓴 물에 나무가 던져진 형국과 같지 않습니까? 마라의 쓴 물에 던져진 한 나무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계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입니다. 따라서 십자가가 우리를 살릴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처방입니다. 여호와 라파는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요 권능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하나님이 가리킨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묵상하시고, 여러분 가슴 한복판에 품어서 고치고 새롭게 하고 살리는 놀라운 여호와 라파의 뜨거운 은총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마라는 언제나 엘림으로 가는 관문이요 통로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라의 쓴 물 없는 엘림의 오아시스는 없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죽음의 쓴 잔을 마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골고다 없이 어떻게 부활의 새 아침을 맞을 수 있었겠습니까? 시험이란 언제나 학생들에게는 몹시 쓴 잔입니다. 시험은 얼마나 혹독하고 가혹한지 모릅니다. 수능생들을 보십시오. 세상에 그런 전쟁도 없습니다. 수험생이 있으면 가족은 물론 교회도 초긴장입니다. 그 모든 시험을 피하지 않고 통과해야 하는 이유는 그 쓴 잔을 마셔야만 진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학위도 얻고, 취직도 되고, 의사도 되고, 판검사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마라를 둔 이유는 더 큰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엘림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38장 17절입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마라를 주신 것은 내게 엘림을 주시기 위함이다는 고백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절대 마라에서 쓴 잔을 마셨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엘림이라는 오아시스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감사합니다. 마라가 엘림으로 가는 전진 기지입니다. 쓴 물이 오아시스로 가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전에 큰 시험을 겪는 어느 집사님 가정을 찾아가 ‘이게 다 하나님이 집사님을 사랑해서 주시는 아픔이라’고 했던. 그분이 발끈 화를 내며 ‘무슨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게 다 있냐’고 성을 냈습니다. 안 믿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마라의 쓴 물이 복의 통로라고 믿는 자에게는 엘림을 만나게 됩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불과 10km거리입니다. 2시간 거리입니다. 백성들이 엘림의 샘물 곁에 장막을 쳤습니다. 엘림은 언제나 마라 가까이에 있습니다. 200, 2000km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마라의 쓴 물이 전부인 줄 알고 울며 불며 주님을 원망하고 체념합니다. 그게 다 마라를 축복의 통로로 볼 줄 아는 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마라가 곧 엘림으로 가는 관문이요 과정임을 확신하는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실 쓴 물은 단물을 주시기 위해서인데, 마라에서 쓴 물을 마셔 본 사람만 제대로 인생을 아는데, 마라 때문에 엘림이 그만큼 더 아름답고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데, 우리는 그걸 늘 놓칩니다. 이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마라 때문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에 마라가 왔다는 것은 불과 2시간 거리에 엘림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안도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가 마라를 잘 통과해 엘림이라는 오아시스에 장막을 치고 하나님께 기쁨의 영광을 드리는 큰 은혜와 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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