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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60110m 여호와 이레(창 2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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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20160110m</p>
<!-- paragraph:p0002 -->
<p class="p1">창 22:7-14</p>
<!-- paragraph:p0003 -->
<p class="p1">여호와 이레</p>
<!-- paragraph:p0004 -->
<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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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어린 이삭이 자기를 불사를 나뭇가지를 등에 지고 모리아 산을 오르며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위하여 준비할 것이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미 거기에 숫양 한 마리를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아들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로 바칩니다.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가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렇게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체험한 남다른 하나님의 복이고, 그의 신앙고백이요 간증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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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9 -->
<p class="p1">사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언제나 여호와 이레라는 복이 같이 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은 다 여호와 이레의 복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조건 본토와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지만, 이미 가나안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무조건 집을 떠났습니다. 100세가 되도록 자식 한 명 없이 살았는데, 알고 봤더니 이삭이라는 복덩어리를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여호와 이레란 이렇게 인생의 필요와 바람을 하나님이 최상의 것으로 준비해 놓고 계신다는 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과연 어떻게 그런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되었을까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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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여호와 이레를 말하면 흔히 하나님이 다 준비하시겠다고 하니 나는 그저 팔짱 끼고 구경만 하면 되겠구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이레가 그런 복은 아닙니다. 절대 우연이나 실수는 아닐텐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그런 복을 받았을까요? 누가 그런 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p>
<!-- paragraph:p0012 -->
<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우선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우르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유브라테스 강의 하류로 지금의 페르시아만, 이라크 남부지방 일대를 가리킵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이 살 때 그는 이방신을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가족은 갈대아 신을 믿었다고 합니다. 실제 여호수아 24장 2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거기에서 우상제조업을 했다고 합니다. 우르라는 지명도 그 지방 사람이 섬기던 달의 신 &lt;오르&gt;에서 왔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우상을 섬겼을 뿐 아니라 그 우상을 제조하던 사람이었으니, 아브라함도 당연히 그 우상을 섬겼을 겁니다. 특히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와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서 전격적으로 본토와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족과는 달리 하나님만 섬겼기에 그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낯선 신의 황당한 명령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때는 자기 종족의 영역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뜬금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합니다.</p>
<!-- paragraph:p0014 -->
<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이삭을 바친 사건만큼 황당한 사건도 없습니다. 번제는 짐승의 목을 따 피를 뽑아 제단에 뿌리고, 고기는 부위별로 각을 떠 제단 숯불에 다 태워 바치는 제사입니다. 그야말로 온전한 헌상과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어떻게 제 아들의 목을 따 피를 뿌리게 하고, 고기는 각을 떠 숯불에 태워 바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것입니다. 이렇게 잔혹한 엽기적인 비극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입니다. 일말의 저항이나 항의도 없이 아들 등에 나무를 지워 모리아 산을 오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따지고 불순종하고 달아날 수 있는 명분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인육에 굶주린 신이 아닐진대 어떻게 생사람을 잡아 바치라는 것입니까? 100세에 아들 주실 때는 무엇이며, 이제 잡아 바치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터무니없는 요구에 아무런 저항 없이 순종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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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창세기 22장 18절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이 누린 여호와 이레의 복은 절대 거저 주어진 게 아니고, 그의 놀라운 불가사의한 순종의 결과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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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19 -->
<p class="p1">여호와 이레는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복인 여호와 이레는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 주어집니다. 오늘 이 사건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망령이 드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피에 굶주린 분이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기 위해 그를 시험한 사건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 이하입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고기와 피를 원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기 위해 시험하셨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이레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사법고시 100번 보는 것과 아브라함의 이 시험 한 번 보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렵겠습니까? 유사 이래 이렇게 어려운 시험도 없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 이렇게 잔인한 고문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이렇게 합니다. 본문 9절 이하입니다.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시험 잘 통과했으니 네게 여호와 이레의 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십시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6절 이하도 보십시오.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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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1 -->
<p class="p1">여러분, 시험이 없으면 영광도 없고, 진학도 승진도 없습니다. 힘든 시험일수록 그 영광도 그만큼 큽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우리 제직 가운데, 혹독한 시험 때문에 힘드신 분 계십니까? 그야말로 외아들을 잡아 바치는 아픔을 겪는 분 계십니까? 내 인생에서 이것이 무너지면 끝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다 외아들 이삭입니다. 건강, 직장, 남편, 아내, 자식 말입니다. 그런데 하늘 같은 내 외아들의 신변에 큰 위기가 닥친 것이 시험이고, 우리는 누구나 그런 시험을 당하면 절망하며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기보다 100배 1000배는 더 소중한 아들을 제 손으로 잡아 바쳐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험 앞에서도 그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칼로 아들의 목줄을 따면서도 끝내 하나님은 죽은 아들이라도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에 자기의 목을 내댔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절대 괜히 주어지는 행운이 아니라, 혹독한 시험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값진 보상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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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3 -->
<p class="p1">여호와 이레는 반드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하필이면 외아들을 제물로 요구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늘 외아들로 우리를 시험하실까요? 우리가 다 외아들에게 내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온통 거기에 빼앗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외아들을 통해 시험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면 우리의 모습을 당장에 다 아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아들을 통해 시험하면, 우리의 본심과 믿음이 적나라하게 다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자주 돈을 요구하십니다. 돈이 있는 곳에 우리의 전부가 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돈에 목을 매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돈 앞에서는 우리의 본심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한 마디만 하시면, 우리의 신앙의 원색이 다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하나님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믿음도 좋고 하나님도 좋지만, 100세에 얻은 내 아들 이삭만큼은 안 된다는 게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내 목숨은 가능하지만 내 외아들만큼은 안 된다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실패를 반복하는 정확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달라는 것 다 줄 수 있는데 이삭 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p>
<!-- paragraph:p0024 -->
<p class="p2"><br></p>
<!-- paragraph:p0025 -->
<p class="p1">제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실제 이런 분을 보았습니다. 고3짜리 수험생 아들을 공부하라며 주일날 교회 얼씬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지옥을 가도 좋으니 무조건 서울대만 붙여달라는 엄마도 봤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다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그 엄마 탓할 것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본심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절대가 아니라, 외아들이 절대 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이유,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어 마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토록 소중한 외아들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냐 외아들이냐에서는 끝내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절대였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하나님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 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꼭 명심해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눈에 보이는 혈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원칙은 하나님 절대주의였습니다(모노 야웨이즘). 모노 야웨이즘이 그로 하여금 여호와 이레의 복을 누리게 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면 여호와 이레의 복을 누리며 살지만, 외아들 중심주의로 살면 외아들도 잃고 여호와 이레도 잃습니다. </p>
<!-- paragraph:p0026 -->
<p class="p2"><br></p>
<!-- paragraph:p0027 -->
<p class="p1">우리가 하나님 절대주의로 삽시다. 제직들이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준비하사 모든 것이 성취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올해 여호와 이레의 복이 우리 교회와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p>
<!-- paragraph:p0028 -->
<p class="p1"><br></p>
<!-- paragraph:p0029 -->
<p class="p1"><br></p>
<!-- paragraph:p0030 --><span class="archive-media-placeholder"><a href="https://www.youtube.com/embed/i-2d4Jbu0Xo" title="미디어 원본"></a></sp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