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5 아기와 구유(눅 2:8-14) 성탄축하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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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5
눅 2:8-14
아기와 구유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새벽 새로운 감격으로 이 땅에 성탄하신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빛이 여러분과 가정에 충만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종교는 득도의 종교, 고행과 수도의 종교입니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다 상향식 종교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티벳 불교의 오체투지를 아시지요? 온몸을 던져서 절하는 의식입니다. 두 팔꿈치, 두 무릎, 이마가 땅에 닿아야 합니다.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렇게 오체투지를 하면서 수백 킬로미터 거리의 라사까지 가서 거기에 있는 사원에서 부처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과 이념들은 모두 상향식입니다. 인간이 라사까지 신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인간이 오체투지를 하며 신을 찾기 위해 몸부림하는 종교, 철학, 사상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넓은 우주 어디에서 신을 찾는단 말입니까? 더구나 하나님은 우주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시적인 세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 분을 어떻게 이 우주에서 찾습니까? 1961년 우주를 처음 비행한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은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했던 첫 마디가 ‘우주에 가봤더니 하나님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로켓을 타고 가봤자 우주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노력으로는 절대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이 하나님을 뵙고 교제하며 소통할 수 있을까요? 상향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내려오시는 하향식 방법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말하는 성탄과 임마누엘이 바로 그런 방식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인간이 부단히 오체투지를 하며 하나님을 찾다가 극적으로 만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자신의 전부를 던진 사건이 성탄이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다가 용케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이 비천한 자리까지 자신을 평가절하한 사건, 비하한 사건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와 철학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력과 희생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 이 땅으로 내려오신 종교요 사상입니다.
구약의 야곱의 사다리 사건 아시지요? 야곱의 사다리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 위해 세운 사다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린 사다리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다리를 타고 야곱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야곱이 만난 겁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종교입니다. 이 대목에서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 이 땅에까지 친히 내려오신 종교입니다.
본문은 2015년 전 첫 성탄 때 들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탄생 소식을 전하는 대목입니다. 11절 이하를 다시 봅니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는데, 그 아기가 메시아(그리스도)라는 표적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그분이 그리스도(메시아) 되심의 표적이 된다는 걸까요?
우선 강보에 싸인 아기입니다. 왜 주님이 아기로 오셨을까요?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철저한 가부장 사회였기에 아이나 여성들은 미안하지만 사람 수에 들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메시아고 그리스도라고 해도 어린 아기로 와서는 구주로서의 신분과 정체성을 인정받기 힘든 지독한 권위주의의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그리스도라면 처음부터 성인으로 나타나셔야 옳았습니다. 아니면 어린 아기로 출생했을지라도 구약시대 선지자처럼 신비주의로 30년 정도 계시다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며 등장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이게 그 사회에 더 어울렸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아기로 오셔서 그 아기가 그리스도요 메시아라는 사실을 사전에 천사와 목자, 동방박사를 통해 공개하셨습니다. 아기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오직 겸손한 자만이 주님을 뵐 수 있고, 영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겸손의 화신입니다. 성경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였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 곧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겸손하지 않으면 절대 성탄하신 주님을 경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실제 아기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적대했던 세력은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헤롯왕, 제사장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교만이 하늘을 찔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교만했기에 아기 예수로 오신 메시아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했던 목자들, 동방박사들, 시므온과 안나를 보십시오. 갓 태어난 아기지만 그가 구주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그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겸손한 사람만 갓난아기로 오신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교만한 사람은 주님을 비웃고 적대할 지언정 영접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아기로 오신 것은 우리 인생의 진정한 선구자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이 처음부터 아담처럼 30세 청년으로 나타나셨다면, 보기에 좋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아기로 오신 것은 우리 인생의 삶의 애환을 겪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눈물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선구적으로 다 당했기에 우리의 모든 사정을 깊이 헤아리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진정한 구주이십니다. 또 우리가 기도하고 탄원하면 그 누구보다 그 기도를 이해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산다는 게 얼마나 처절하고 고난에 찬 것인지를 주님이 잘 아시기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삶을 격려하십니다. 당신께서 밑바닥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구유입니다. 그가 구유에 누웠다는 게 우리의 구주되심의 물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여관에 들 사정이 못 돼서 본의 아니게 구유에 탄생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유에 누웠다는 게 메시아 되심의 증거라고 천사들은 말합니다. 만약 주님이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구유에 오시지 않았던들 어떤 이들은 주님을 뵐 수 없었을 겁니다. 마굿간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만약 주님이 궁궐이나 대저택에서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목자 같은 비천한 이들이 찾아와 경배할 수 있었겠습니까? 너무 높고 잘 나서, 가진 게 많고, 교만해서 주님을 못 뵐 사람은 있어도, 가난해서 주님을 뵙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외양간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요람이 아니라 구유에 성탄하셨습니다. 누구든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흔히 교회도 돈이 있어야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현실 교회에서는 그런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돈 없는 자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비천한 자리로 오신 겁니다. 교회가 너무 고급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소외감을 느낀다면, 그곳에는 주님이 계신 곳이 아닙니다. 주님은 외양간 구유에 오셨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요람이 아니라 춥고 초라한 외양간 구유에서 주님이 오늘 성탄하셨습니다. 누구든 나아가 주님을 뵙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구유로 오신 데는 보다 깊은 계시의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처음 주님을 뵙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위해 희생되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희생양으로 오신 겁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실 대속의 제물로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게 주님의 정체성이요 존재의 비밀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이 태어날 장소가 어디이겠습니까? 양이 어디 안방이나 궁궐, 대저택에서 태어나겠습니까? 양이니까 당연히 외양간입니다. 주님은 제대로 오신 겁니다. 분수에 맞게 오신 겁니다. 처음부터 운명적이고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희생양으로 오신 분이기에 외양간 구유로 오신 겁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주님의 외양간 탄생과 구유에 누이심은 결코 감상적이거나 목가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혹은 외양간으로 밀려난 불행한 사건이 아닙니다. 보다 깊은 의미의 구속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주님의 외양간 성탄은 이미 주님의 희생양으로서의 죽음을 암시하고 계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구유에 누이신 주님의 성탄이 이미 어린양의 대속의 죽음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외양간 구유에서 주님의 죽음을 봐야 합니다.
성탄의 의미와 어린 양의 무한한 대속의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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