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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0m 다말 이야기(마 1:1-6)

20151220m

마 1:1-6

다말 이야기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사람들은 보통 성경이니까 성경에는 오직 아름답고 성스럽고 은혜로운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대와는 달리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얘기도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간사의 온갖 지저분한 이야기도 다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이 이런 치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감추려 하거나 축소하거나 미화하려고 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다 드러냅니다. 


본문인 주님의 족보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훌륭하시니 당연히 주님의 조상들도 다 대단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족보의 특이점 하나는 유대 족보에 절대 올라갈 수 없는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무려 5명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여성은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우리나라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족보에 등재하지 못했습니다. 유대 사회도 전통적으로 매우 완강한 가부장적 사회였습니다. 여성은 사람 숫자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중동 이슬람 국가들은 여성의 인권을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계보에 여러 명의 여성이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당시 관행으로 볼 때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조신하거나 품행이 방정한 여인이었다기보다는 이방인이거나 삶의 이력이 그리 모범적이지 않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모친 마리아 외에는 성녀들이 아니었습니다. 라합은 이방 창녀였고, 룻은 이방여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불륜녀였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다말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3절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유다는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넷째 아들입니다. 유다와 다말은 당연히 부부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둘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관계입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관계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겁니다. 이런 패륜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계보에서 주님이 탄생하신 겁니다. 


원래 유다는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엘, 오난, 셀라입니다. 그런데 장남 엘이 다말과 결혼해 미처 자식을 못 보고 요절합니다. 이스라엘 전통적인 혼례법에 의하면,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 형의 대를 잇게 해줘야 합니다.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시형제 혼례법입니다. 당시 근동에는 이런 관습법이 있었습니다. 엘이 죽자 둘째인 오난으로 하여금 형수와 결혼해 대를 잇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난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비록 혼례법에 의해 형수와 결혼은 한다 하여도 자신의 씨로 난 자식이면 자기 아들이지 왜 형의 아들이 돼야 하냐는 겁니다. 자기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삼촌이라고 부르는 현실을 오난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8장 9절을 보면, 오난이 형수와 결혼해 관계를 가질 때마다 자신의 씨를 주지 않으려고 체외 사정을 합니다. 고의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짓이었기에, 하나님이 오난을 치십니다. 오난도 형처럼 요절했습니다. 다말은 졸지에 두 번째 남편마저도 잃고 박복한 여인이 됩니다. 


시아버지인 유다도 그렇습니다. 며느리 하나가 잘못 들어와 대를 이어줄 손자도 못 얻고 졸지에 아들 둘만 잃었다고 생각하니 며느리가 꼴도 보기 싫었습니다. 이러다가 자칫하면 막내 셀라까지도 죽이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창세기 38장 11절입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은 너무도 슬펐습니다. 시아버지인 유다에게 매달려 사정합니다. 시집을 온 이상 여기가 제 집이라고 하며 이 집에서 쫓아내지 말라고 합니다.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 앞에서 애걸복걸하지만 유다는 막내가 성인이 되면 내가 너를 다시 데려오겠다며 친정으로 보내버립니다. 


이후 아무리 기다려도 시아버지가 다말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시아버지 유다도 부인을 잃고 홀아비가 되어 살고 있고, 셀라는 이미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시아버지는 다말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말이 유다가 양털 깎는 일로 친정에서 가까운 딤나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 순간 다말은 기발하면서도 모험적인 계략이 떠올립니다. 목숨까지 건 작전을 실행합니다. 지금까지 수절하며 입었던 과부의 옷을 벗어 던지고, 화장을 하고, 성문으로 나가 요염한 자태로 시아버지 유다가 그 길을 지나가기만 기다렸습니다. 다말은 원래 종려나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다말은 종려나무처럼 예쁜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다말이 성문에 나가 시아버지를 기다리는데, 유다는 다말을 보더니 창녀로 알고 다가와 수작을 겁니다. 이 대목을 창세기 38장 16절 이하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다말의 전략은 아주 치밀했고 성공적이었습니다. 화대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받기로 하고 일단 담보로 유다의 도장, 끈, 지팡이를 잡은 겁니다. 이튿날 유다가 사람을 보내 새끼 염소를 갖다 주고 인감 도장과 지팡이를 찾아오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다말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납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친정에 가 있는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유다가 노발대발하며 당장 다말을 화형에 처하라고 합니다. 드디어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 앞에 끌려와 최후진술을 합니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다고 합니다. 다만 이 물건의 주인을 찾아달라고 하며 시아버지의 도장과 지팡이를 내놓습니다. 유다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그래 내가 졌다. 네가 옳았다고 합니다. 내가 막내 셀라를 주지 않자 네가 이렇게라도 해서 우리 가문의 대를 이으려 했구나 라고 합니다. 


윤리적으로 보면 패륜의 극치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여인이 예수님 족보에 오르고, 그녀의 아들 베레스가 유다 지파의 가계를 잇는 주자가 됩니다. 베레스가 다윗 왕의 10대 조상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먼저 다말이 패륜을 불사하며 유다 가계를 고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말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복의 약속이 유다 가계를 통해 계승되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그 가계에 남기로 한 겁니다. 자신이 그 계보의 주자를 출산하는 걸 소원한 겁니다. 그랬기에 남편을 둘씩이나 잡은 여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막내 셀라를 기다렸으나 여의치 않자 결국 시아버지를 공략해 극적으로 임신에 성공합니다. 다말로서는 유다 가문에 자신이 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것은 시조부 야곱의 경우와 같습니다. 야곱은 차남이기에 하나님의 복을 승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유의 방법을 동원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장자권을 훔칩니다. 말도 안 되는 패륜을 범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십니다. 왜냐면 구원의 계보에 서는 일이라면 그게 비록 율법을 범하고 인륜과 천륜을 범하는 것일지라도 감행하겠다, 죽어도 좋다는 믿음을 하나님이 높이 사신 겁니다.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다말의 대책 없는 믿음에 결국 하나님이 승복하신 겁니다. 다말에게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극단적이고 비상하며 살인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윤리며 도덕을 다 상대화 한 겁니다. 다말의 도박은 시아버지 유다에 대한 인간적 보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야곱 못지 않는 치명적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믿음에 감복하신 겁니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여자가 주님의 족보에 오르게 하고, 그 계보에서 주님이 탄생한 겁니다. 


야곱의 이야기나 다말의 얘기는 우리에게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목적이 아름답다 해도 그런 부도덕한 행위가 용인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헌금을 하기 위해 절도나 강도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목적을 위한 수단도 정당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다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주님의 계보에 이름을 등재하는 일이야 말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쟁취하여 궁극적으로 구원의 반열에 서는 게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다말은 구원의 가계에 서는 일에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죽음이라 해도 감수하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 점을 높이 사신 겁니다. 그래서 다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위대한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메시아의 계보에 이름을 올린 다말의 가공할 믿음을 깊이 생각합시다. 목숨을 걸고 모험한 그녀의 비상한 선택과 결단을 깊이 사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같은 거룩한 사람뿐 아니라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같은 사람도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랬기에 우리의 이름도 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깊이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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