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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51129m 나를 따르라(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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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51129m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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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눅 9:57-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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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나를 따르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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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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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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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디트리히 본회퍼라는 신학자를 아십니까? 천재적인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에게 저항하다 1945년에 39세의 나이로 처형을 당합니다. 올해가 본회퍼 목사님의 서거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분이 쓴 책 가운데 &lt;나를 따르라&gt;(Nachfolge) 라는 책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토대로 제자의 도리를 밝힌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제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뒤따르는 자(Nachfolge)라는 말을 씁니다. 제자라는 말보다는 더욱 역동적인 뒤따르는 자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주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내 제자가 되라고 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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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오늘이 벌써 1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한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의 지난 1년을 회고하며 회개하는 자세로 이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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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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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처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본인이 자원해서 따르겠다고 나선 케이스입니다. 57절입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따르겠다는 사람은 적극적이다 못해 공격적인데, 주님의 반응은 소극적이고 미온적입니다. 왜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부푼 가슴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의 열정에 찬물을 왜 끼얹으셨을까요? 주님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말은 참 좋고 근사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함정은 으레 행복할 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좋게 얘기하면 순진 순수하고, 나쁘게는 지나치게 맹목적이고 경솔합니다. 이런 사람은 툭하면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원해서 따르겠다는 사람을 주저앉힙니다. 5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여우와 새는 유대인들에게 부정적인 말입니다. 암몬 족속을 여우라 했고, 헤롯을 여우라고 했습니다. 새도 마찬가집니다. 새가 다 먹어버린다는 것을 빗대어 침략자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로마 사람을 새떼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니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환영하는 대신에 경계하신 겁니다. 결국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실망해서 돌아간 것 같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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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주님이 이런 유형의 사람을 가장 먼저 언급한 이유는 실제 이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많았다는 겁니다. 주님께 기대하는 바가 많은 사람 말입니다. 돈이나 명예에 기대를 걸고 주님을 좇는 사람은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주님은 그런 기대를 바라고 따르는 사람을 멀리 하십니다. 주님은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가난한 분이기에 돈이나 명예의 기대를 갖고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막연하게 일방적으로 맹목적으로 주님을 따른다면 주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장삿속으로 주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여기에 걸립니다. 지금도 우리는 축복만 기대하지 우리 가운데 몇 명이나 고난을 각오하고 주님 뒤를 따르고 있을까요? 주님을 따른다는 게 무엇을 뜻하고, 어떤 자세와 각오와 결단으로 주님을 따르는 게 바람직한 제자상인지 연말에 진지하게 성찰하시길 바랍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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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두 번째 사람도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먼저라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르되 먼저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용납해 달라는 겁니다. 59절 하반절입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돌아가신 부친 장례야 말로 인륜지대사입니다. 이 사람은 합리적이고 모범생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놀랍게도 냉혹하게도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이 죽은 자들에게 죽은 자를 장사하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다루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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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보통의 경우에는 아버지를 챙기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인륜지대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주님 따르는 게 1순위라는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따르는 데 문제란 겁니다. 우리의 제1순위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원칙과 신념을 갖고 계십니까? 부친 장례와 주님 따르는 일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올해도 여러분은 주님 따르는 일을 제1순위로 여기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니면 주님 따르는 일을 자꾸만 후순위로 미루며 살았습니까?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자세를 바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명실상부한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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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9 -->
<p class="p1">마지막 사람입니다. 61절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그래도 이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에 내가 따르겠노라며 즉각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 역시도 지금 당장 따르긴 하되, 딱 5분만 달라고 하며 가족과 작별인사하고 오겠다고 합니다. 안 따르겠다는 것도, 내일 따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잠깐만 부모님께 작별인사하고 오겠다는 겁니다. 우리 기대와는 달리 주님은 비정하기 짝이 없게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런 사람은 손에 쟁기를 잡고 있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옛날 쟁기질하는 것 본 적 있으십니까? 쟁기질이 쉽지 않습니다. 반듯하게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쟁기질 하는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면 제대로 골을 파겠습니까? 모세를 따라서 애굽을 탈출했던 이스라엘이 툭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했던 사람은 뒤를 돌아다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홍해를 건너게 하셨을까요?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라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뒤돌아 봤습니다.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만 제외하고 탈출 1세대는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아간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가나안 문턱까지 와서도 뒤를 돌아봤습니다. 롯의 아내도 구원의 성으로 뛰다가 뒤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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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아주 긴박하고 긴급한 종말론적 과제입니다. 위기의식을 갖고서 집중해야 합니다. 올해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습니까? 날마다 인사 하느라 주님 따르는 일에 소홀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누구도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따르겠다고 하면서, 잠깐 가서 인사하고 오겠다고 합니다. 인사도 중요합니다만, 문제는 이것이 주님 따르는 데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쉽고 서운한 일이지만 과감하게 미련을 버리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는 일보다 절박한 과제는 없습니다. 주님 따르는 과제 앞에서 우리의 핑계를 다 상대화하십시오. 오죽하면 부친상 치르는 일보다 주님 따르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겠습니까?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어서 그렇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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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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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부디 주님 앞에서 엄숙히 올 한 해를 결산하며 새해엔 더욱 주님 따르는 일에 매진합시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도,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제자가 됩시다. </p>
<!-- paragraph:p0024 -->
<p class="p1"><br></p>
<!-- paragraph:p0025 -->
<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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