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m 시험 당할 즈음에(고전 1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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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8m
고전 10:12-13
시험 당할 즈음에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반드시 우리가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그 조차도 당할 즈음에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와 격려가 됩니까? 사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환난이나 고통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를 믿어 보면, 평안보다는 오히려 고난이 더 많습니다. 사실 여기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넘어지고 좌절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자꾸만 내 삶에 시련이 발생할까요?
일단 신자가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내 인생을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개입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 이하입니다.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우리가 살면 얼마나 경건하게 삽니까? 우리가 옳게 산다한들 그게 하나님 성에 차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자꾸만 우리 삶을 간섭하십니다. 우리 쪽에서 보면 그게 시련이고 환난인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게 우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입니다. 우리에 대한 은혜고 복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깨달을 때만 우리는 정말 바울처럼 시험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며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예수 믿는다고 고난과 시험이 면제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환난이 있다고 하고, 사도행전에 보면 우리가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만사형통을 바라지만, 사실 신앙생활에는 그럴 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누구나 편안하고 일이 잘 되면 주님 찾을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 믿게 되셨습니까? 건강하고 일이 잘 풀릴 때, 돈이 잘 벌릴 때 입니까? 그런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 시련을 당하고, 환난이 닥쳤을 때, 외로울 때,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니 시련이나 환난이 은혜고 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사형통을 반드시 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픔, 환난, 시련을 반드시 불행이라고 해석하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별 일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안 계실 분도 계실 겁니다. 우리는 누구도 아무 어려움이나 고통 없이 주님을 찾고 기도할 만큼 경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죽을 병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아무도 아픔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죽어도 좋을 만큼 늘 죽음을 준비하며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건강하게 살다가 아프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잠자듯이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어느 날 갑자기 죽어 주님 앞에 서도 떳떳할 만큼 부끄럼 없이 살지 못합니다. 따라서 병은 주님이 베푸신 배려요 복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다니시던 성도님이 쓰러지셨습니다. 만 4년이 넘도록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왜 저렇게 하시는지는 그 본인과 주님만 아십니다. 그분은 예수를 안 믿고 66세까지 살다가 제 발로 어느 날 우리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하다가 1년이 채 안 돼서 쓰러졌습니다. 저는 그분이 비록 자리에 누워 계시지만, 그분의 영혼만큼은 지난 4년 동안 누구보다 자유롭게 깊이 주님과 교제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병상에 누운 지금 이 시간이 어쩌면 그분에게는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일 수 있습니다. 아마 주님과의 밀월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못 다한 기도도 날마다 원 없이 하면서 주님과 깊이 교제하고 있을 줄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기에 하나님이 그를 안 데려가십니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분은 가장 아름답고 복된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겁니다. 60년 이상 예수 모르고 살았으니 주님과 교제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 땅에서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말미를 주신 겁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게 맞습니다. 그분은 지금 자신의 생애 최고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 겁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딱한 사정에 대해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해석을 내려서는 옳지 않습니다.
꿈에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 준비 없이 살다가 갑자기 가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이에게는 최대의 재앙입니다. 아무 준비 없이 함부로 살다가 어느 날 죽어 눈 떠보니 주님 심판대 앞이면 그때의 절망감, 낭패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갑자기 죽으면 안 됩니다. 준비된 상태에서 죽어야 합니다. 주님과 해후할 채비가 된 상태에서 죽어야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평생 몸에 박힌 불치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그 가시를 악마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치병을 몇 차례나 간절히 사투를 벌이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게 실은 저주가 아니라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너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안전장치를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누구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자로서 자칫 교만할까봐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제어장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바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크게 기뻐하고 기뻐함은 나의 이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불치병이 자기의 치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세상 사람들은 고난이 적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인의 형통을 보고 시험에 들고, 의인의 고난을 보고 시험에 듭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없는 사생자에게는 매가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고아를 야단칠 사람이 없습니다. 막말로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어차피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해지기에 살아 있을 동안에 세상 낙을 즐기라는 게 공의로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만사형통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엄격한 아버지가 계십니다. 날마다 간섭당하고 꾸중 듣고 매 맞고 자랍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행복인 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식을 마냥 이뻐하는 것만 사랑입니까? 부모가 자식 때리는 것만큼 마음 아픈 것은 없습니다. 그냥 두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의 고난은 내게 아버지가 계시다는 물증입니다. 다 자식 잘 되라고 꾸중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환난이 도리어 복입니다. 환난 중에 기뻐하라는 역설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아버지가 계시다는 산 물증입니다. 그러니 감사하고 기뻐하고 복인 줄 알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굳이 환난으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실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통제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풀어줘도 통제가 안 됩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조금만 섰다고 생각하면 기고만장입니다. 환난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요즘은 상상도 못할 만큼 달라졌다고는 하는데, 전에는 군대에서 사병들을 조금도 그냥 두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멀쩡한 연병장이라도 파게 하고는 다시 묻게 했습니다. 왜냐면 휴식을 많이 주면 반드시 사고를 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가혹한 시련을 당하게 하십니다. 이게 끝이라는 막다른 골목까지도 우리를 몰아가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서 그렇지 하나님 편에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피할 길을 먼저 마련하십니다. 절대 대책 없는 시험, 절망의 나락으로 내모는 시험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별세한 박완서 작가는 1988년에 남편을 암으로 잃고, 그 후 3개월 만에 27살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들은 서울 의대를 나와 서울대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아들이었습니다. 작가는 그 모진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남편과 아들의 뒤를 따라가겠다며 하나님께 대들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식으로 대하냐고 포악을 떨었다고 했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에 그 내용이 잘 나옵니다.
“기도시간에도, 산책을 하면서도, 긴긴 밤 잠 못 이루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나의 물음은 딱 한 가지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런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포악을 떨고 항거하던 이유는 나는 그닥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장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응답이 들려왔다. 소화가 안 되어 변기에 무릎을 꿇고 다 토해내고 나자, 계시처럼 내 죄가 떠올랐다. 나는 내 가족 외에 타인에겐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물론 악을 저지른 적은 없으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크나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이 태산 같은 고통을 주신 것을 그때 처절하게 깨달았다.”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기도도 안 하고 예배도 안 드립니다. 아직 자기 능력이 통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마냥 편하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시련을 주시고 아픔을 겪게 하십니다.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는 밤잠 안 자고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환난이 없으면 주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예배에 나와 봤자 잠잡니다. 그러나 환난이 닥치면 자세가 달라지고 기도가 비상해집니다. 우리는 외로울 때 주님을 부릅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처럼 시험 당할 때가 실은 우리가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면 평안할 때는 위기고 불행일 수 있습니다. 평안하고 돈 많고 건강하면 게으르고 나태하기 밖에 더 합니까? 신나게 돈 쓰고 다니며 죄 지을 일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께 건강 주시고, 돈 주시면 사실 뻔할 뻔자입니다. 그래서 건강 뺏고, 돈을 안 주십니다. 그래야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면 다 골프 치러 나갈 것 아닙니까? 적당히 약하게 하시고 또 가끔 때려주시니까 지금 이 예배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실패가 차라리 복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왜 유명합니까? 무엇보다 글을 많이 남겼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의 2/3가 다 바울의 편지입니다. 왜 그가 이토록 많은 편지를 썼습니까? 목회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라고 하면 크게 성공한 목회자처럼 생각합니다. 바울이 훌륭한 목회자요 사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성공한 목회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전도해 수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사실 한 곳도 제대로 된 교회는 없었습니다. 다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문제가 발생한 교회마다 편지를 쓴 겁니다. 바울이 쓴 편지는 단순 안부편지가 아니라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쓴 편지였습니다. 신약성경의 2/3가 다 바울이 실제 겪은 환난과 고난의 산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시련이 없었으면 바울이 쓴 신약성경도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연단하셔서 어떤 선을 이루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상처뿐이라 해도 이런 사실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주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꼭 피할 길을 내심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이 미쁘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그래서 바울처럼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함을 체험하고, 시험 중에 도리어 감사하고, 고난이 부끄럼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거리라고 고백하는 은총이 여러분께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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