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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1m 하나님의 개그(창 21:3-6)

20151101m

창 21:3-6

하나님의 개그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우리나라 사람은 확실히 서양 사람들에 비해 덜 웃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정서를 지배해온 불교나 유교문화가 다 엄숙주의였기 때문입니다. 웃음을 경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웃는 사람을 실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식 날 신부가 웃으면 딸 낳는다며 웃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인지 신앙생활도 우울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기독교적 삶이 내 삶의 흥을 깬다는 묘한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내 삶의 여러 즐거움을 기독교 신앙이 방해한다며 신앙생활을 기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기독교에는 웃음이 없습니까? 


요한복음은 당신의 공생애를 가나 혼인집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초상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잔칫집에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또한 거기에서 공생애 첫 기적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포도주를 물로 만든 게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을 당신의 공생애 개막 기적으로 삼으신 이유는 당신께서 열어갈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계시한 사건입니다. 천국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져가듯 웃음이 고갈한 세상에 기쁨을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금욕주의, 형식주의, 은둔주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유대인이 주님을 비난할 때 날마다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욕으로 그렇게 불렀지만, 주님은 자주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습니다. 주님은 천국을 말씀하실 때 자주 잔칫집을 주제로 삼으셨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타락하는 바람에 그 즐거움의 낙원인 에덴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웃음이 변하여 울음이 되고,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기쁨이 슬픔으로, 생명이 죽음으로 바뀐 겁니다. 그러므로 에덴에서 추방된 후부터 우리는 누구나 울며 태어납니다. 평생을 울며 살다가 결국 가족들에게 슬픔과 눈물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게 인생입니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울음이 아니라 웃으며 태어나도록 창조된 존재였을 겁니다. 웃음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주신 원초적인 복이요, 울음은 죄 때문에 온 비본래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울음은 분명 죄의 쓴 열매입니다. 우리는 불행해서 울고, 아파서 울고, 회개하느라 웁니다. 울음은 죄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울음은 죄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훗날 천국에 가면 거기에서는 울 일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눈에서 그동안 흘린 눈물을 바꿔주십니다. 거기서는 더는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 없습니다. 두 번 다시 슬퍼하거나 눈물 흘릴 일이 없습니다. 천국은 영원한 웃음의 나라요 잔칫집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웃음의 조상입니다. 창세기 17장 17절 이하입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겠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개그하신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그런 말씀 말고 계집종 하갈에서 얻은 이스마엘로 대를 잇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아들이 태어나면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며 작명까지 해주십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웃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웃고, 18장에서는 사라가 웃습니다. 18장 11절 이하입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설교 본문인 창세기 21장 6절도 마찬가집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누가 사라를 웃겼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100세요 90세된 부부가 아들을 낳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하나님의 개그입니다. 


아브라함을 웃기고 사라를 웃기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웃음의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웃게 하시면 모든 이가 다 웃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남편이 100세요 아내가 90세인데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웃을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을 보며 부부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겠습니까? 4-50세에 낳은 늦둥이도 그렇게 즐겁게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90세 100세가 낳은 아들이라니, 이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주님의 모형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 문제가 해결되면 웃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전한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유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앙겔로스는 소식입니다. 행복한 소식 듣고 슬퍼할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 없는 90세 100세 된 부부에게 아들을 낳는다고 하는 게 복음입니다. 믿을 수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기적 같은 행복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제대로 듣는 사람은 행복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90-100세 된 부부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오신 분입니다. 


여러분, 지옥에는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뿐 절대 웃음이 없습니다. 웃음은 오직 천국에만 있습니다. 세상에도 웃음이 있습니까? 행복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사실은 울음이요 통곡일지 모릅니다. 돈이 없어 결혼 못한 노총각이 길을 가다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줍습니다. 램프를 문지르니 거기에 거인이 나옵니다. 거인이 한 가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노총각은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노총각은 돈도 여자도 결혼도 필요했습니다. 그 순간 노총각에게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세 가지 소원을 한 가지인 것처럼 돈 여자 결혼이라고 순식간에 말했습니다. 거인이 그걸 한 가지로 접수했습니다. 거인이 돈 여자(돌아버린 여자)를 노총각에게 나타나게 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기쁨보다는 화고 불행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로또에 당첨됐다고 죽도록 즐거워했는데, 그것 때문에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행복이 행복이 아니고, 웃음이 웃음이 아닙니다. 올해 몇 번이나 웃을 일이 있으셨습니까? 날마다 짜증내고 아이들에게 소리지르며 다툴 일은 많았지만, 얼마나 웃을 일이 있었던가요? 웃음이 풍성해야 복 있는 교회인데, 그렇지 못합니다. 웃음이 없는 건조한 교회는 누구도 다시 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상갓집처럼 무겁고 우울한 교회를 누가 또 오고 싶겠습니까? 여러분은 머리 감을 때 어디부터 감으십니까? 눈부터 감지요.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싸우면 눈부터 감습니다. 우리나라 초등생들은 집에 가장 들어가기 싫을 때가 엄마 아빠가 싸울 때라고 했습니다. 엄마가 신경질을 부리면 엄마가 마귀할멈 같다고 했습니다. 가장 좋을 때는 엄마 아빠가 서로 대화하고 웃을 때가 좋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기쁨과 은혜의 영입니다. 늘 굳어 있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인데, 정작 우리는 늘 굳어있거나 우울한 표정으로 살면 말이 됩니까?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참혹하게 죽이는데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는 그들이 한결같은 미소 띤 얼굴로 죽더라는 겁니다. 네로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고 고민했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처참히 죽어가는 데도 그의 얼굴은 천사같이 밝았다고 합니다. 빛나는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죽은 겁니다. 웃음이 복입니다.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해도 어찌 순교자들의 아픔과 시련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굶주린 사자에 찢기고, 불타는 장작더미에 던져지면서도 결코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사형수로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 우리에 양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얼마든지 기쁘고 즐거워하며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다다음주일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자족하며 감사하며 사십시오. 반드시 성령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확신하십시오. 우리는 훗날 천국 갈 사람들이기에 웃는 훈련을 평소에 해야 합니다. 그렇게 웃으며 이삭처럼 웃음을 나누며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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