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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agraph:p0001 -->
<p class="p1">20151025m 종교개혁기념주일</p>
<!-- paragraph:p0002 -->
<p class="p1">시 115:1, 롬 11:36</p>
<!-- paragraph:p0003 -->
<p class="p1">쏠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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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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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7 -->
<p class="p1">(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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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우리는 구교입니까? 신교입니까? 신교입니다. 구교인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개혁해서 좀 더 성서적이고 새로운 교회가 되기 위해 출범한 신교, 곧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개신교입니다. 올해가 개신교의 기원인 종교개혁(Reformation) 498주기입니다. 이제 500주년이 2년 남았습니다. 독일의 마틴 루터(M. Luther)가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며 로마 가톨릭에 선전 포고한 1517년을 원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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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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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런데 사실 종교개혁은 독일의 루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스위스의 쯔빙글리(Zwingli),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John Knox), 불란서의 존 칼빈(J. Calvin)도 다 개혁가들입니다. 그러면 장로교는 어느 계열입니까? 존 칼빈입니다. 칼빈이 유럽 개혁교회, 다른 곳의 장로교회의 시초입니다. 개혁교회를 리폼드 처치(reformed church)라고 하고, 독일은 레포미어테 키르헤(reformierte Kirche)라고 하고, 장로교는 프레스바이테리언 처치(presbyterian church)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이 계열의 교조는 칼빈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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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오늘은 칼빈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칼빈은 프랑스 사람이어서, 발음상으로는 장 칼뱅입니다.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90km 떨어진 노용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그 지방의 유지였습니다. 칼빈은 14세 때 아버지 뜻에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대학 신학부에 진학합니다. 거기서 성경, 고전어, 고대철학을 배웁니다. 그러나 5년 만에 갑자기 아버지 마음이 변해 신학을 그만 두고 법학을 공부하라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와 뜻이 맞지 않아 자주 갈등을 빚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사제 만드는 걸 포기한 겁니다. 칼빈은 졸지에 전공을 바꾸어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독일의 루터와는 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루터는 독일의 작은 광산촌인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 에어푸르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와 함께 길을 가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숯덩이로 변한 끔직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법학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칼빈은 먼저 신학을 하다가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으로 바꿉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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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어쨌든 칼빈은 법학을 공부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지체 없이 신학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칼빈은 고전어를 잘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유럽대학에서는 신학이 가장 어려운 학문으로 꼽힙니다. 고전어 때문입니다. 옛날 교부들의 문서가 라틴어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고,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 언어가 다 필수과목입니다. 그래서 다른 공부는 다 부전공을 요구하는데, 신학만큼은 부전공이 없습니다. 고전어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고전어를 즐겼습니다. 이때가 1530년대 초반, 그가 20대에 들어서던 때입니다. 독일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10년을 넘기며 더욱 그 세를 확장해 가던 때입니다.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가 1531년 7월에 로마 가톨릭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를 당합니다. 그의 죽음은 처참합니다. 로마 가톨릭군이 돌로 쯔빙글리의 머리를 쳐서 쓰러뜨린 후 그가 다시 일어나려하자 창으로 가슴을 찌릅니다. 쯔빙글리는 나는 죽지만 당신들은 내 몸만 죽일 수 있을 뿐이다고 하면서 순교합니다. 쯔빙글리 나이 48세 때입니다. 루터가 몹시 아꼈고, 스위스 종교개혁의 투사였던 쯔빙글리는 그렇게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칼빈은 개혁가는 아니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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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7 -->
<p class="p1">그러던 차에 1534년 10월에 칼빈과 아주 가까운 사이었던 파리대학 철학교수가 그 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어 취임식을 갖는데, 그 취임식 연설원고를 칼빈이 작성합니다. 그 원고의 내용이 로마 가톨릭 사상에 위배된다고 하여 당국이 그를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칼빈은 유랑생활을 하며 개혁운동에 가담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프랑스 남부도시 스트라스부르크에 갔다가, 스위스 바젤로 가고, 나중에는 이태리로도 가는데 정착할 곳이 없었습니다. 다시 노용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네바에 들렀다가, 거기에서 개혁운동을 하던 파렐에게 붙잡혀 거기에 정착합니다. 제네바에서 칼빈은 한 번은 강제 추방을 당하는 수모도 겪습니다. 결국 다시 복귀하여 목회하고 성경을 주석하고, 기독교 강요라는 유명한 저술을 냅니다. 제네바의 대학을 설립했고, 거기에 유학 온 사람들이 칼빈의 개혁사상을 배워 자국으로 돌아가 개혁을 주도하면서 칼빈의 개혁운동이 퍼집니다. 그러다가 제네바 시는 칼빈에게 전권을 주면서 신정(theocracy)이 시작됩니다. 칼빈은 양심적 금융사업을 시작해서 은해이 발달하고, 수공업을 장려하여 시계 산업이 발달합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근대 자본주의의 뿌리를 칼빈으로 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칼빈은 32세에 결혼하지만 10년도 못 돼 아내가 죽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도 2주 만에 죽고 맙니다. 칼빈의 전기에 보면, 칼빈은 우울한 작가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칼빈은 건강이 좋지 못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루터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어도 63세까지 살았는데, 칼빈은 겨우 55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서거하자 제네바는 울음바다에 빠지고, 장례식은 전 제네바 시민이 참여하여 치러지는데, 그의 유언대로 묘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가 칼빈의 종교개혁의 기치였는데, 마지막도 그렇게 갔습니다. 학자들은 어거스틴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사사가로 칼빈을 꼽습니다. 루터가 역동적인 운동가였다면, 칼빈은 냉철하고 이성적인 행정가요 가장 교리적인 변증가였습니다. 루터가 온몸으로 시작한 종교개혁을 신학적으로 조직화하고 체계화한 사람은 칼빈입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의 두 원류요 거대한 두 산맥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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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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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그럼에도 이 두 사람의 교리적 입장이 언제나 일치했던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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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우선 구원관입니다. 가톨릭은 행위로 공덕을 축적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 시대에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을 지으면서 자금이 부족하자 면죄부를 팔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게 면죄부를 사면 그 순간 공덕이 부족해 천국에 못 가고 연옥에 대기 중인 자기 부모 형제가 즉각 천국으로 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늘 이 구원관에 회의를 품어 오던 루터가 거기서 결정적으로 돌아섭니다. 1517년 10월 31일 자기가 수도사요 교수로 일하던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문에 써 붙인 95개조 반박문이 거의 면죄부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강조점은 조금 다릅니다. 가톨릭의 행위를 부정하고, 루터의 믿음을 수용했으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믿음 이전의 예정과 선택에까지 소급합니다. 칼빈은 루터가 말하는 믿음 조차도 내 노력이나 내 결단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이루어진 예정과 선택의 결과라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구원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단지 예정으로 인한 구원의 결과요 열매요 물증이라고 합니다. 루터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한 반면에, 칼빈은 창세 전에 이미 우리가 구원 받았기에 믿는다고 한 겁니다. 루터는 선 믿음 후 구원인데, 칼빈은 선 구원 후 믿음입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은 못 믿는다는 겁니다. 오직 창세 전에 주권적으로 선택 받은 사람만, 예정된 사람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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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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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다음은 성서관입니다. 가톨릭이 범한 치명적 과오는 성경을 일반 신자에게 개방하지 않고 사제들만 독점했다는 데 있습니다. 평신도는 사제를 통해 성경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사제들의 권위와 교권 유지를 위한 중요한 방편이었습니다. 중세 때는 일반인이 모르던 라틴어로 된 성경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종교개혁에 착수해 가장 먼저 손 댄 분야가 성경 번역사업입니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지난 1000년 동안 오직 사제의 전유물이었던 것을 평신도에게 돌려줍니다. 독일 사람은 지금도 500년 전의 루터 번역 성경을 사랑합니다. 가톨릭은 정경 66권 외에도 외경과 교황의 교서까지 성경과 대등한 권위로 취급합니다만, 루터는 오직 성경, 곧 66권만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교황의 교서나 외경은 거짓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도 루터의 성경관은 진보적입니다. 그는 열왕기서의 신빙성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 말이 한 번도 안 나오는 에스더는 처음부터 잘못 들어갔다고 했고, 야고보서나 요한계시록은 평가절하 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성경의 진정한 저자라는 신념에 누구보다 철저했습니다. 1540년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로마서 주석을 낸 이후 죽기 한 해 전에 낸 여호수아 주석까지 거의 성경 전부를 주석했습니다. 단지 요한2,3서, 계시록만 빠졌는데, 그가 더 살았다면 아마 다 주석했을 겁니다. 칼빈의 주석들은 그의 기독교 강요와 함께 2000년 교회사에 불후의 명저로 꼽힙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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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4 -->
<p class="p1">다음은 성찬입니다. 가톨릭은 포도주와 빵이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상징설로 떡과 포도주를 신비화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칼빈은 상징보다는 기념설이 더 성서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상징이나 기념이나 그게 그것 같은데 끝까지 두 사람은 합의를 보지 못합니다. 칼빈은 상징이라고 하면 굳이 포도주나 빵이 아니어도 된다는 겁니다. 맹물로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러나 기념이라고 하면 반드시 포도주와 빵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쨌든 칼빈의 입장은 그렇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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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6 -->
<p class="p1">마지막으로 개혁의 원칙입니다. 루터는 두 왕국설(Zwei-Reiche-Lehre)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의 왕국과 세속 왕국을 엄격히 구분하고, 교회는 하나님 왕국만을 추구하는 게 종교개혁의 진정한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중세 1000년이 암흑 천지였던 것은 중세 교권이 정권까지 장악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입장은 크게 다릅니다. 두 왕국설이 아니라 그리스도 통치설(Herrschaft-Christi-Lehre)입니다. 루터의 두 왕국설이 이원론이라면, 칼빈은 일원론입니다. 모든 세계가 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교회만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온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지 못한 것은 개혁해서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두는 게 종교개혁이라고 봤습니다. 루터는 하나님 왕국과 세상을 구분해서 각기 제 길을 걷자는 것이고, 칼빈은 어느 왕국이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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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8 -->
<p class="p1">같은 시대, 같은 종교개혁의 기수로 투쟁한 사람이지만 루터와 칼빈은 그 입장과 강조점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칼빈 계열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언제나 칼빈 신학에 맞춰서 설교했습니다. 종교개혁 사상, 더 나아가 칼빈 계열의 신학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고 우리 한국교회의 이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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