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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20151018m 강청 (눅 1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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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20151018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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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눅 11:5-13</p>
<!-- paragraph:p0003 -->
<p class="p1">강청</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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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5 -->
<p class="p1">[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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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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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내일부터 4주간 특별새벽기도에 들어갑니다. 기도에 계절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가을이 좋습니다. 사색적인 계절이기도 하고, 수능도 있고, 한 해를 결산하는 계절이 가을입니다. 이번 특별새벽기도회에도 많이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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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09 -->
<p class="p1">기도는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게 기도라고 합니다만, 사실 가장 어려운 게 기도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기도를 잘 모릅니다. 기도원 원장도 잘 모르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는 영원한 비밀이고 수수께끼일지도 모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막무가내로 떼쓰는 게 기도입니까? 하나님께 구걸하는 게 기도입니까? 하나님을 윽박지르며 자기 소원을 따 내는 게 기도입니까? 8절 하반절입니다.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이어지는 유명한 9절도 보십시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러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간청하라는 것입니다. 간절한 청원, 주문, 요구가 기도입니다. 개정개역판은 &lt;간청&gt;이라 되어 있지만, 개역성경에는 &lt;강청&gt;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lt;강청&gt;이 더 원어에 가깝습니다. 원어는 &lt;아나데이아&gt;인데, 문자적으로는 전혀 수치심이 없는 뻔뻔한 요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한 요구라는 뜻의 간청보다는 강력한 주문, 뻔뻔한 요구인 강청이 더 원어에 가깝습니다. 간청이라는 말의 원어는 &lt;데에시스&gt;입니다. 본문은 이보다 더 훨씬 강한 &lt;아나데이아&gt;입니다. 그래서 강청이라 번역하는 게 더 맞습니다. 기도는 간청이라기보다는 강청입니다. 기도를 여러 가지 어휘로 설명하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강청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하고 간결한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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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1 -->
<p class="p1">강청은 기도의 본질을 꿰뚫어 본 말입니다. 기도는 절대 송구스런 부탁이 아닙니다. 강청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미안하고 염치없어 가급적이면 기도를 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자꾸만 주님께 요구하는 게 속보인다는 겁니다. 이것은 겸손이나 양심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분은 기도를 아직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말고도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자기마저도 하나님께 구하면 되겠냐며 기도 안 하는 겁니다. 이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당당한 요구요 강력한 청원이며 떳떳한 자기의 권리 행사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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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3 -->
<p class="p1">왜 기도가 간구나 간청보다 더 강력한 강청일까요? 어떤 사람이 밤늦게 친구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집에 손님이 왔는데 먹을 게 없어 그러니 떡을 좀 달라고 합니다. 안에서 친구가 이미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기에 못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친구가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발걸음을 돌렸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집이 떠나갈 듯 소리 지르고 문을 두드리며 외칩니다. ‘너 죽을래? 빨리 안 일어나? 이 나쁜 놈아!’ 세상에 이런 불한당이 어디 있습니까? 늦은 밤에 남의 집에 먹을 것 얻으러 온 주제에 어쩌면 이렇게도 무례할 수 있습니까? 이게 간청입니까 강청입니까? 당연히 강청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고 부탁한 제자들에게 주님이 기도의 본질을 알려주시기 위해 창작한 예화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잠자리에 들었던 사람이 일어나 떡을 내줍니다. 투항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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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5 -->
<p class="p1">여러분, 밤에 친구 집을 찾아가 무례히 떡을 요구한 사람은 무슨 권리로 그렇게 했을까요? 또 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사람도 어째서 안 된다고 하다가 결국 일어나 먹을 것을 내주었을까요? 이것은 이 둘의 관계 때문입니다. 그 둘은 아무리 늦은 밤에 찾아가서 대문을 두드리며 떡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워도 허물이 되지 않는 죽마고우였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람 집에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면 그 사람이 과연 무사했을까요? 그러나 그 둘은 친구지간이었기에 그 무례하고 뻔뻔한 강청이 통했습니다. 기도는 단순한 부탁이나 구걸이 아닙니다. 간청이 아닙니다. 강청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니은이 아니라 이응입니다. 더구나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친구가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입니다. 11절 이하입니다.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부모에게 슬픈 표정 지으며 구걸하는 자식 봤습니까? 자식에게 적선하는 부모 봤습니까? 맡겨놨다는 듯이 자식이 요구해도 부모는 자다가도 일어나 자식에게 다 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 된 죄입니다. 기도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무자비한 권리행사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강청입니다. 기도를 간청이라 정의하는 것은 미흡한 겁니다. 기도는 잔인합니다. 뻔뻔합니다. 철면피한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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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이렇게 기도는 근본적으로 관계이지 방법이 아닙니다. 기도는 신분이요 소속이요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요령이나 수단, 방법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징징거리거나 시를 씁니다. 방법이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방법은 거칠수록, 무자비할수록 좋습니다. 기도는 언어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만 그쪽으로 생각하기에 기도에서 기술이나 응답받는 요령을 배우려고 합니다. 자꾸만 불쌍한 표정을 지어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합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강청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해야 기도를 하는 우리의 자세가 체념이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기도는 정성, 치성이 아닙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닙니다. 기도는 떳떳하고 당당한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를 기억하시지요? 수세가 아니라 공세로 나아가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진수입니다. 이게 강청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항복하십니다. 네게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다는 뜻의 &lt;이스라엘&gt;이란 새 이름을 주십니다. 새 출발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기도의 조상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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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19 -->
<p class="p1">생각해 보십시오. 본문의 이 사람이 친구집을 찾아가 강청하지 않고 사정하고 구걸했다면 과연 떡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신사적으로 나갔다면 떡을 못 얻습니다. 무식하고 무자비하게 막 쳐들어갔기 때문에, 친구지간이란 자기 신분을 마구 들이댔기에 성공한 겁니다. 자격을 내밀고, 관계를 들이대고, 권리를 흔들며 맹렬히 쳐들어갔기에 결국 떡을 얻어낸 겁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자식의 강청에 약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십니다. 13절 상반절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너희도 이런데 하늘 아버지는 너희보다 더 허무하게 무너지신다고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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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2"><br></p>
<!-- paragraph:p0021 -->
<p class="p1">13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가 강청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시되 &lt;성령&gt;을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안 주시고 성령을 주십니까? 이 무슨 동문서답입니까? 그러나 이게 맞습니다. 강청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은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강청하든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lt;파라클레토스&gt;, 보혜사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진정한 기도 응답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따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한 방에 해결됩니다. 원리가 같습니다. 어떤 문제든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해결하십니다.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주시고, 해결해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 모든 문제의 해답은 언제나 성령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의 모든 강청이 해결되고 수습됩니다. 이 가을에 강청이라 하는 기도 생활에 더욱 정진합시다. 그래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해결되기를 기원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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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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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p1"><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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