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10605m: 바울의 자연관(롬 8:19-23)

2011년 6월 5일 주일낮예배/환경주일
본문: 롬 8:19-23
제목: 바울의 자연관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오늘 본문은 성경의 자연관이요 바울의 자연관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물이 고통하며 탄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21절은 피조물이 해방을 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해되십니까? 들에 핀 한 송이 꽃을 보며 자연을 예찬하고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신음소리, 비명을 듣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방언입니까? 

바울이 이 글을 쓴 때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입니다. 2000년 전에 무슨 오염이 있었겠으며, 공해가 있었겠습니까? 환경파괴니 생태학적 위기니 하는 개념이 있었겠습니까? 물론 그때도 문화는 있었습니다. 헤브라이즘, 헬레니즘, 그레코-로만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문화는 반자연적인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다 이질적입니다. 환경파괴적입니다만, 바울 당시의 문화는 그런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환경이나 자연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원시 자연을 유지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비관적인 자연론을 논할 수 있었을까요? 자연이 신음하고, 자연이 해방을 기다린다는 것 말입니다. 바울의 이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자연관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구약 창세기 3장 17절 이하입니다.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아내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건 아담이요 인간인데, 왜 애꿎은 땅까지 저주를 받습니까? 노아의 홍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6장 5절 이하입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죄를 지어 죄가 세상에 가득하다면, 사람을 징계하고 심판해야하는데, 사람뿐만 아니라 육축과 공중의 새까지도 쓸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엿새째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 모든 자연을 맡기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자연을 인간에게 위탁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2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의 운명을 접수하는 대목입니다. 이때부터 사람과 자연이 하나의 운명체가 되었습니다. 사람과 자연은 운명공동체입니다. 자연 따로 인간 따로가 아닙니다. 성서적으로는 하나입니다.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반려입니다. 함께 가는 겁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와 같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파괴되면 사람도 파괴되고, 사람이 거듭나면 자연도 구원받습니다. 인간의 운명과 자연의 운명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으며 깊은 함수관계에 있는지 노아의 홍수를 통해 보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40주야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40일간 하늘에서 쏟아진 비는 구름에서 내린 폭우가 아닙니다. 저 대기권 위에 있던 궁창 위의 물이 40일 동안 지상에 쏟아진 겁니다. 창세기 1장 6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궁창을 사이로 그 위에 물이 있었습니다. 이게 케노피입니다. 궁창 아래의 물은 바다입니다. 지구가 케노피와 바다물에 싸여 있었습니다. 이게 이상적인 형태였습니다. 그때는 굉장히 지구 환경이 쾌적했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습니다. 케노피의 온실효과 때문입니다. 어디나 온도가 일정했습니다. 그때는 계절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기에 이상적인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시사철 먹을 게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케노피가 노아의 홍수 때 사라진 겁니다. 지상으로 다 쏟아진 겁니다. 그 물이 남극과 북극에 다 얼어있습니다. 지금 바다물이 굉장한 것 같지만, 지구가 가진 물의 1/4밖에 안 됩니다. 3/4은 남극과 북극에 얼어 있습니다. 이게 녹으면 파국이 온다는 겁니다. 케노피가 땅에 쏟아져 내리자 계절이 생겼습니다. 태양으로부터 가장 먼 남극과 북극은 얼었고, 적도는 열대가 되었습니다. 태양과 가까워지면 봄과 여름이요, 멀어지면 가을이고 겨울입니다. 원래는 남극 북극이 없었습니다. 케노피가 있을 때는 어디든 쾌적했습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이후에 계절이 옵니다. 계절이 온다는 것은 식량이 반으로 줄었다는 얘깁니다. 전에는 뿌리고 거두는 때가 따로 없었습니다. 이제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야 합니다. 가장 큰 문제가 식량문제였습니다. 홍수 직후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 거움, 추움, 더움, 여름, 겨울이 쉬지 아니하리라.’ 케노피가 사라지면서 없던 심는 일, 거두는 일, 추위, 더위, 여름, 겨울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리신 처방이 이제는 동물도 잡아먹으라고 했습니다. 계절이 생긴 후로 먹을 게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은 채식성이었습니다. 열매와 채소만으로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케노피가 사라진 이후에 본의 아니게 육식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9장 3절입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런데 이때부터 인간의 수명이 줄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건강에 육식이 심각한 변수가 된 겁니다. 채식만 할 때는 평균 나이가 900세가 넘었는데, 육식을 하면서부터 수명이 급격히 줄어 147세를 산 야곱을 거쳐 다윗에 이르게 되면 우리와 같은 수명에 이릅니다. 다윗은 70세까지 살았습니다. 노아 홍수는 인간의 먹거리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뿐 아니라 태양이 방사하는 고주파 방사선을 걸러줄 필터가 사라진 것입니다. 자외선, 감마선, 엑스선을 케노피가 여과했습니다. 인간에게 유익한 저주파만 지구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케노피가 사라지면서 태양이 방사하는 고주파까지 지구의 모든 생물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생물의 노화와 퇴화가 진행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먹거리와 함께 인간의 수명을 떨어뜨려 이젠 100세도 못 사는 존재로 만든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짓자 자연이 저주를 받게 되고, 자연이 저주를 받자 인간에게 치명적인 재앙이 되어 되돌아오는 악순환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이 신음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이 두 가지를 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듭난 자들입니다. 인간이 회복되어야 자연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인간 회복이 이루어져야 인간의 죄로 인한 자연의 저주를 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환경이 회복됩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환경은 개선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탄식하고 신음하며 우선 사람이 중생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둘째, 자연이 궁극적으로 고대하는 것은 21절에 나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이것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성취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게 진정한 자연의 해방이요 궁극적인 자유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입니까? 이사야 11장 6절 이하입니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게 주님의 재림과 함께 도래할 영원한 세계입니다. 계시록 22장 1절 이하입니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여러분, 장차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보다 자연이 완벽히 회복된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오염이 없습니다. 공해가 없습니다. 생명나무 실과가 달마다 날마다 열리는 곳입니다. 어떤 아픔도, 눈물도 없는 나라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영원한 세계인데, 자연이 지금도 그런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연이 당장은 중생하는 인간이 좀 더 많기를 바라지만, 장기적으로는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히 살 세상은 자연이 배제된 곳이 아닙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 받았다는 말씀과, 지금도 자연이 신음하고 탄식하며 인간이 거듭나기를 바라고, 해방의 날, 구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진지하게 책임적으로 듣고 응답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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