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10605n: 일반계시 특별계시(시 19:1-14)

2011년 6월 5일 주일오후예배
본문: 시 19:1-14
제목: 일반계시 특별계시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편의 주제는 자연과 말씀입니다. 자연과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크신 은총입니다. 자연과 말씀이 가장 아름다운 복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데 동원한 수단이 자연과 말씀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자연과 말씀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자연은 일반계시이고, 말씀은 특별계시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를 우리 인생에게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 계시의 수단을 우리에게 다 노래하고 있습니다. 굳이 문단을 나눈다면 1-6절까지는 자연에 대한 예찬입니다. 7-10절까지는 말씀에 대한 찬사입니다. 11-14절까지는 이 두 계시에 대한 다윗의 응답이자 결단입니다. 

우선 일반계시인 자연을 보겠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장 20절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어있기에 자연을 보면 누구든 하나님을 감 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영성이 투명하면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자연을 더듬어 하나님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자연은 하나님이 정교하게 조화롭게 만드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작품인 자연 속에 하나님의 정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연이 존재하는 한, 일반계시가 존재하는 한,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 모른다 핑계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6절 하반절을 보면,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고 합니다. 우리는 들풀 한 포기에서도 하나님의 따뜻한 온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훌륭한 방편입니다. 우주의 신비와 조화와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 능력의 오묘함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풍성합니다. 넉넉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낍니다. 들을 귀,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자연계시를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일찍부터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존재론적 신증명입니다. 이 우주만물은 그게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끊임없이 움직이고 운동한다는 겁니다. 도미노처럼 수만 개 수십만 개가 쓰러지지만 최초의 벽돌 하나는 사람이 건드려야 하듯이, 이 최초의 원인자/원동력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게 존재론적 신증명입니다. 다음은 목적론적 신증명입니다. 이 우주에는 아무리 하찮은 것에도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천지만물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자연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계시합니다.

그런데 일반계시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 능력, 위대하심, 존재는 깨닫게 하지만, 결정적인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 십자가의 도, 성육신의 진리 같은 것들은 계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연계시의 한계입니다. 이것을 위한 것이 바로 특별계시인 말씀입니다. 자연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을 깨달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는 말씀이 절대적입니다. 

말씀에는 우선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말씀에는 설교가 있습니다.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케리그마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구원에 결정적인 특별계시입니다. 말씀이라는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구속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닫는 겁니다. 7절 이하를 보십시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해서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해서 우리의 눈을 밝힙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그래서 10절에서는 말씀이야말로 정금보다 귀하고 꿀과 꿀송이보다 더 달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진수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체험해야 합니다.

다윗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앞에서 두 가지를 기도합니다. 첫째 기도는 이겁니다. 13절입니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전에는 고범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요즘 우리가 짓는 죄는 몰라서 짓는 죄입니까? 알고도 짓는 죄입니까? 후자입니다. 잘 알고도 죄 짓습니다. 자연과 말씀이 있으니까 알 것 다 압니다. 그런데도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짐짓 죄입니다. 그릇 범죄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이 고의로 죄를 범하지 말게 해달라고 합니다. 자연과 말씀을 주셨기에 다 알면서도 죄짓고 사니 짐짓 죄를 짓지 않게 해 달라는 겁니다. 모르고 짓는 죄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도 짓는 죄는 악성입니다. 짐짓 죄는 용서를 못 받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연과 말씀 앞에서 짐짓 죄를 범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둘째, 다윗은 이것을 빕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고범죄를 짓지 않는데서 멈출 게 아니라 더 나아가 입과 말로 주의 계시를 묵상하며 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응답하며 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윗의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를 주셨고, 특별계시인 말씀도 주셨습니다. 기록된 말씀, 선포되는 설교, 육신이 되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받을 것 이미 다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짐짓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렇게 살지 않게 해 달라는 게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결단과 함께 우리도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설교 듣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TxRigdUJy7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