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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8년 5월 18일 푸른교회 주일낮예배/청년주일<br>본문: 행 8:14-17, 19:1-7<br>제목: 사마리아 사람들과 에베소 제자들</p>
<!-- paragraph:p0002 -->
<p>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7]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br>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p>
<!-- paragraph:p0003 -->
<p>지난 화요일에 제가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br>저는 교회가 서울이어서 제가 가끔 새벽기도를 푸른교회에서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푸른교회의 낮예배를 참석했다가 조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실례인줄 알면서 편지를 하게 되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저는 11년 전 물세례를 받고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해 기도해 왔습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과 전도사님들도 성령세례를 받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 목사님은 성령세례가 먼저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받는 물세례보다 성령세례가 먼저라고 하시니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세례의 증거인 방언을 아직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이 문제에 대해 저의 교구 목사님께 전화를 했더니 사도행전 8장과 19장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전화를 끊고 성경을 찾아 보니 정말로 물세례 후 성령세례를 받더군요. 그러면 목사님의 지난 주일 설교와 다르지 않습니까. 지난 10년간 제가 성령세례를 위해 기도해 온 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꼭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p>
<!-- paragraph:p0004 -->
<p>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어떻게 답해야 합니까? 여러분도 내심 이런 의문이 있으십니까? 지난 주일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린 것은 성령세례는 물세례 이후 어떤 요건이 충족되었을 때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고넬료 가정처럼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맞물려 있어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보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물세례보다 성령세례가 먼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해야 물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성령세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 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가짜로 물세례를 받는 것말고는 성령세례 없이는 물세례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제게 편지를 주신 분은 물세례를 받은 후 지난 10년간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해 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p>
<!-- paragraph:p0005 -->
<p>사도행전 10장 44절 이하입니다: “[4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베드로를 모시고 고넬료 가족이 설교를 들었습니다. 말씀을 깨닫자 성령이 강림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고백하자 베드로가 이방인임에도 성령을 받았으니 어찌 물세례를 금하리요 하면서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고넬료 가정의 성령세례와 물세례 사건입니다. </p>
<!-- paragraph:p0006 -->
<p>이 사건 이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가서 보고하는 대목이 사도행전 11장 15절 이하입니다: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의 성령세례 보고를 하자,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며 찬송하는 대목입니다. 성령세례와 회개는 불가분리이며, 회개의 공인의식이 물세례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회개란 물세례와 같습니다. 초대교회는 적어도 물세례와 회개 그리고 성령세례를 따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세례를 통해 회개하고 계속해서 더 잘 믿으면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초대교회는 생각했습니다.</p>
<!-- paragraph:p0007 -->
<p>그러면 지난 주 제가 말씀드린 이런 내용에 대해 반론으로 제시한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8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 핍박이 닥치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앞장서서 기독교를 박해하며 다른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니까, 사도들만 남기고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전국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사방으로 피신한 성도들이 피난지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스데반과 같이 초대교회의 집사로 피택받은 빌립은 사마리아로 피난을 갔습니다.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잘 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되자, 사도들이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 이방인들이 어떻게 복음을 용납했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 현지로 파견을 했습니다. 8장 5-6절입니다: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12절입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복음을 믿자 물세례까지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도들이 그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거기로 급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대목은 그들이 신앙고백하고 물세례를 받았음에도 한 사람도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자 비로소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물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세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물세례가 먼저이고, 물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세례가 없지 않느냐 하며 그래서 권위있는 사도가 와서 안수하자 성령세례를 받지 않았느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경우는 일반적인 예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 경우를 일반화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대목을 근거로 해서 물세례가 먼저이고 성령세례가 나중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p>
<!-- paragraph:p0008 -->
<p>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관심사는 초대교회의 대단히 중요했던 관심사인데, 초대교회의 당면과제는 이방인 구원문제였습니다. 이방인도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기독교의 전신은 유대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유대인입니다. 초대교회도 처음에는 유대교와 섞여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본산인 회당을 이용했고, 안식일과 유대교의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유대교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를 했기에 본의 아니게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유대교는 유대인들만의 민족종교입니다. 여호와는 유대인들만의 민족 수호신입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다 저주받은 족속이요 지옥의 땔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배타성이 얼마나 강합니까. 이런 유대교에서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최후로 유언을 남기시기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기독교의 세계화를 앞두고 이방인 구원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이방인들도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되는가? 그들에게 선교를 해야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이방인 구원문제를 다룹니다. 예를 들어 2장을 보면 성령강림 때 이방의 지명을 소개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인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나오고, 8장 26절을 보면 이디오피아 내시의 구원문제가 다뤄지고, 10-11장에서는 이방인 로마사람 고넬료 가정의 구원문제, 14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선교 얘기, 15장에 가면 이방인 구원문제가 주 의제였던 예루살렘 회의가 나옵니다. 여기서 이방인을 상대로 선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결정합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합법성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가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은 아직도 공인을 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초대교회가 고민하고 갈등하고 기도하다가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 구원문제를 공인한 것입니다. </p>
<!-- paragraph:p0009 -->
<p>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선교는 아직 초대교회에 이방인 선교에 대한 아무런 방침이나 원칙, 확신이 없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수용했다는 복음을 받고도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또 그들이 복음을 정말 수용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안수하자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외적인 사건입니다. 갈등하고 있는 사도들의 눈 앞에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들도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이방인들도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연출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최고 권위의 사도가 현지에서 직접 이방인들이 체험하는 성령세례를 목격하고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초대교회로 하여금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한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결국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나서 회의를 통해 교회적인 결정을 한 것입니다. </p>
<!-- paragraph:p0010 -->
<p>다음은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의 제자들입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하자 몇몇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를 자처하면서 바울을 찾아 왔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19장 2절입니다: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런데 그들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대목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성령도 못받고 무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의 질문을 보면, 이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너희가 제자요 신자라고 하니까, 너희도 성령을 받았겠지 하면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뜻밖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성령이 있다는 사실도 듣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그 순간 바울이 감을 잡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믿음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했습니다. 물세례를 받았다면 신앙고백을 하면서 회개했을 터인데, 대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완전한 세례가 아닙니다. 그는 율법과 복음 사이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신앙고백을 하고 물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볼로 라는 사람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그는 해박하고 대단했지만, 복음에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물세례를 베풀자 비로소 성령이 강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도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구분되는 예가 아닙니다. 오히려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맞물려 있음을 가리키는 대목입니다. </p>
<!-- paragraph:p0011 -->
<p>마지막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게 편지를 주신 분은 방언의 은사가 없기에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으면 거의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자 방언이 터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경우 성령세례 때 방언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사도행전의 시대는 성자시대가 가고 성령시대가 개막되는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존재에 대한 홍보가 필요하던 때였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성령에 대해 모르고, 성령세례에 대해서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강림하실 때 초자연적 현상이 동반되었는데, 특히 방언이 자주 터진 것입니다. 성령임재의 가시적인 홍보효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모든 성령세례가 방언의 은사를 동반하지는 않습니다. 오늘과 당시의 시대가 다릅니다. 유난히 방언에 집착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 이하입니다: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그러니까 성령이 판단해서 각 개인에게 알아서 은사를 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고전 12:31). 방언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방언의 은사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성령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경우의 성령세례에 방언이 동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령세례를 받은 것을 의심없이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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