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교회 아카이브

20110529m: 경계선상의 존재(창 1:1-5)

2011년 5월 29일 주일 낮예배
본문: 창 1:1-5
제목: 경계선상의 존재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절을 다시 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그러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 우주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때는 태초라는 시간 개념도 우주라는 공간 개념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무(無)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무로부터 창조>는 유명한 교리적이고 신학적 명제입니다. 교리 가운데 창조론이 있습니다. 창조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라틴말로는 creatio ex nihilo 입니다. 무는 허무라는 말입니다. 이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할 때 이 무는 보통 무가 아닙니다. 무슨 무라구요? 절대 무입니다. 헬라말로 <우크 온>입니다. 완전하고도 완벽한 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완벽한 무였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 피조세계에 대한 절대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절대 무로부터 하나님이 먼지 하나까지도 다 창조하셨기에 이 우주에 대한 절대 소유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일까요? 

하나님이 제일 먼저 무엇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이 우주를 엿새 동안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날에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절대 무로부터 창조하셨으니 아무 것도 없어야 맞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게 첫째 날의 사역입니다. 첫째 날 빛을 창조하기 전에는 절대 무여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것은 무엇입니까? 절대 무로부터 하나님이 태초에 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다면 그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어야 맞는데, 2절을 보니, 땅도 있고, 흑암도 있고, 깊음도 있고, 수면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무엇입니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주석해야 합니까? 

창세기 1장 2절과 3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절대 무로부터 이 우주를 창조하신 게 아니라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 천지창조를 하기 위한 여러 질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미 존재하는 어떤 재료를 조합해서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해석이 나오는데, 이런 해석이 맞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이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흔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절대 무 개념과 상대 무 개념을 채용했습니다. 우크 온은 절대 무이고, 메온은 상대 무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절대 무로부터 상대 무를 창조하시고, 상대 무에서 가시적 피조세계를 창조했다는 겁니다. 오늘날까지도 이런 어거스틴의 해석과 창세기 주석이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절은 절대 무에서 상대 무를 창조하신 상태입니다. 2절은 상대 무 상태입니다. 이 상대 무에서 비로소 이 우주를 창조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질료를 조합해 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게 아니라, 절대 무로부터 먼저 상대 무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상태를 창조하신 겁니다. 거기에서부터 좀 더 구체적인 이 우주세계를 창조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천국에서 왔습니까?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도 절대 무로부터 왔습니다. 절대 무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이 세상으로 내려가라고 해서 세상에서 아기로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올 때는 절대 무 곧 허무에서 옵니다.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로부터 참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사람으로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폴 틸리히라는 사상가가 있습니다. 철학자는 그를 철학자의 반열에 세우고, 신학자는 신학자라 칭합니다. 그래서 그는 경계선상의 사상가라고 불리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부릅니다. 독일 히틀러를 피해 미국에서 신학을 강의했는데, 철학적 신학이라는 강좌도 열었습니다. 이 사람은 실존 철학자이자 실존 신학자인데, 인간 실존을 규명하기를 <경계선상의 존재>라고 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바로 틸리히의 명제입니다. 왜 그는 사람을 경계선상의 존재라고 했을까요? 절대 무로부터 왔기 때문에 우리는 한 발은 허무에 딛고 있고, 참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존재에도 참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경계선상의 존재라는 겁니다. 

틸리히의 이런 인간 실존 규정은 성서적으로 옳은 규정입니다. 허무와 존재 사이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본능적으로 두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허무에 대한 그리움, 동경, 향수입니다. 우리는 허무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연어에게만 회귀본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코끼리에게만 귀소본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도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망향심 같은 것 말입니다. 허무로 복귀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게 우리의 정서 가운데 <불안>입니다. 불안은 대상이 없습니다. 그냥 불안한 겁니다. 그래서 불안이 무서운 겁니다. 대상이 뚜렷하면 그 대상을 제거하면 되는데, 불안은 그 대상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을 섞어서 쓰지만, 두려움은 불안과 다릅니다. 두려움은 그 대상이 있습니다. 불안은 우리가 허무에서 왔기에 그 허무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요즘은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우울증입니다. 불안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한 것이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허무의 유혹입니다. 허무가 내 품에 안기라고 유혹하는 겁니다. 죽음의 유혹이 바로 그런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우울증입니다. 이번 달 18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우리나라의 자살 문제를 다뤘습니다. 한국 사회를 가장 위협하는 게 자살현상이라고 했습니다. 부동의 세계 1위가 자살률입니다. 과거에는 일본이 우리보다 더 높았는데, 지금 우리는 일본의 2배입니다. 왜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을까요? 청소년과 청소년의 사망률 1위가 자살입니다. 지난 주 23일 여성 아나운서가 자살했습니다. 나흘이 지나서 유명 가수도 27일 날 자살했습니다. 자살이 유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게 다 허무의 유혹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게 어떻게 치료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경계선상의 존재이기에 이렇게 허무의 유혹과 위협에서 살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있습니다. 나를 창조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향수도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종교심, 종교성입니다. 우리가 올 때는 허무에서 왔지만, 갈 때는 다 주님의 품으로 갑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을 낱낱이 결산해야 하는 심판대 앞으로 갑니다. 자살하는 사람에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허무가 속입니다. 그러나 올 때는 몰라도, 갈 때는 주님 앞으로 갑니다. 이 허무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비결은 참 존재이신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나의 근본적인 불안과 허무를 이기고 평안의 삶을 살려면 그것 밖에 없습니다. 다른 처방은 다 거짓이요 가짜입니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신론은 없습니다. 원시인이나 고등한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본능적인 종교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향수 말입니다. 제대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 1장 전반부에서 우리 인생은 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우리에게 참 평안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게 그 두꺼운 고백록의 주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불안과 허무에 시달립니다. 우을증과 조울증에 위협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경계선상의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키시고, 자녀를 지키십시오. 우리는 원초적으로 절반은 허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경계선상의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존재를 붙잡으십시오. 자녀에게 그 사실을 가르치십시오. 그래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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