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11m: 물세례와 성령세례(행 1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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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1일 성령강림주일/어버이주일 낮예배
본문: 행 11:15-18
제목: 물세례와 성령세례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여러분은 이미 물세례는 받으셨을 줄 압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는 받으셨습니까? 물세례는 무엇입니까? 물세례는 과거의 모든 죄를 물에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으로 지내던 옛사람을 물에 수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세례가 제도화되었기에 처음 교회에 나오면 일정기간이 지나야 신앙고백을 받고 물세례를 베풉니다만, 초대교회의 물세례는 어디서든, 언제든 신앙만 고백하면 그 즉석에서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합니다. 과거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회개한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물세례를 받음으로 죄가 씻기는 것은 아니고, 물세례를 받음으로 옛사람이 자동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사람이 공적인 자리에서 신앙을 고백하면 세례를 베풂으로써 새사람이 되었다고 공인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물세례였습니다. 물세례 자체에 화학적인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회개한 사람이, 예수를 주로 모신 사람이 공개적으로 고백하면 그 사실을 공인해 주는 것이 물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특박을 가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은 가짜입니다. 이것은 자기 양심의 신앙이 아니라 외박이나 외출을 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결혼을 위해 세례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세례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씻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명지대에 교수공채에 서류를 내는데, 첨부서류에 세례 증명서가 필요했습니다. 그 사람이 제게 와서 특별히 부탁하고, 앞으로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세례 증명서를 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 분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세례는 형식이요 의식입니다. 공인의식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성령세례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에 물세례를 받고 입문을 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기도와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면 그 때에 주어지는 것이 성령세례입니까? 성경에는 성령세례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주님이 성령세례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5절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성령세례라는 표현의 첫 번째입니다. 또 한 번은 오늘 본문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의 성령체험을 보면서 주님이 하신 성령세례 말씀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성령세례의 전형이 고넬료 가정의 성령체험이란 것을 베드로가 인정한 것입니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체험을 공부하면 성령세례가 무엇인지가 확실히 밝혀질 것입니다. 여러분,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으로 로마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점령군 사령관으로 팔레스틴에 나와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최소한 유대교도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믿었지만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어서, 복음과 주님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섬긴 것 같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그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데려다가 구원얻을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베드로)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아직 고넬료와 그의 가족은 복음을 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도였기에 하나님은 신봉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팔레스틴에 나와서 유대교도가 된 듯합니다. 그의 믿음이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우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청해다가 너와 온 집안이 구원을 얻을 복음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직 고넬료는 예수도 모르고 기독교 신앙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계시를 받고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청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면, 10장 46절입니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베드로가 한참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것이 고넬료 가정의 성령체험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고넬료 가정의 성령체험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성령세례의 전형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령세례에 관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당시 고넬료 가정의 성령체험이 베드로가 공인한 성령세례였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세례가 언제 주어지는 것이냐를 깨닫게 합니다. 17절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고넬료 가정이 원래 예수를 잘 믿었는데, 베드로가 와서 집중적으로 기도해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모르던 사람이 성령세례를 체험한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예수를 잘 믿어야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처음으로 믿을 때 체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사도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넬료 가정이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접하자 하나님이 성령세례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1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설교를 시작할 때에)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사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성령체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고넬료 가정과 똑같은 은혜로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저희(=고넬료 가정)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사도들)에게 하신 것과 같다’고 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성령세례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들이나 고넬료 가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물세례는 예수를 믿는 누구나 받고, 성령세례는 특별한 사람이 받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았음에도 성령을 달라고 금식하고 철야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을 때 초자연적인 현상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다 방언하고 환상보고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현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판단하십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세례에 특정한 공식이나 법칙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달라고, 성령세례를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세례의 확실한 증거는 ‘방언, 예언, 환상, 진동’이 아니라,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누구도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가가거나 취업, 특박을 위해 가짜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인격과 영혼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않고, 우리가 예수를 구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게 역사하시지 않으면 내가 왜 죄인인지, 왜 회개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죄인임을 자각했다는 사실, 내 의지로 내 죄를 주님께 고백했다는 것은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방언이나 환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물세례보다 성령세례가 먼저입니다. 값없이 주는 선물인 은혜가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내가 결단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선물이 성령세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세례 없이는 누구도 회개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왜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맞물려 있지만, 엄밀히 구분하면 물세례보다 성령세례가 먼저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내가 회개할 수 있고, 공적인 자리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 가정이 성령세례의 전형입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감동이 온 것입니다.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것은 성령에게 이끌려 오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에 순종하여 자기 발로 오셨을 것이고, 어떤 분은 성령이 강권하여 오셨습니다. 성령세례 없이 여기에 와서 예배드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치고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정상 물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있을 지라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세례가 없이는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오랜 전통이고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성령강림이나 성령세례를 위해 기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충만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5장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령세례는 내게 성령이 강림하는 사건입니다. 성령세례를 통해 내 안에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나는 성령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충만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물건이 아닙니다. 양적으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를 통해 내게 강림하신 성령의 정도를 양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께 내가 얼마나 순종하고 복종하느냐의 정도를 이르는 말입니다. 성령충만 지수란 내가 성령께 복종하는 지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지 않다는 말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내 뜻대로, 내 판단대로, 내 기호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양적으로 이르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회개하고, 깨닫게 하시고, 도전을 주시는데도 내 생각대로 살면 그 사람은 전혀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충만 지수와 나의 복종 지수는 정비례합니다.
성령훼방, 성령소멸, 성령근심은 또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마가복음 3장 29절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에베소서 4장 30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이 모든 것은 성령충만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성령을 소멸하고 근심되게 하고 훼방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는 성령을 따른다고 하지만, 우리 실생활은 철저히 성령을 훼방하고, 근심케 하고, 소멸시키며 삽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의 계시에 둔감한 삶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주로 고백한지 오래되었는데도 내가 더는 성령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떠나십니다. 이것이 성령소멸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성령이 내게 감동을 주시는 것도 압니다만, 내 탐욕과 욕심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묵살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악성입니다.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성령의 회의하시고, 그 상태가 계속되면 성령이 떠나십니다. 성령의 소리에 반응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성령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삶이 있습니다. 인격의 본체이신 성령을 내 중심에 모시고 산다는 삶이 비인격적이면 어찌 되겠습니까? 성령세례를 받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고상해야 합니다. 인격적이신 성령의 통제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엉망으로 살면 이것은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답게 그 삶이 고상하고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3장 28절 이하를 다시 봅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성령을 훼방하면 영원히 그 죄를 사함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성령의 기능이 나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는 것인데, 성령을 소멸하면 내가 더 이상 회개의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어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부디 성령의 훼방하고 소멸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 전적으로 순종하십시오. 성령과의 깊은 교통과 교감 속에 사십시오. 이것이 복된 삶이고, 이런 삶이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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