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6m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자(히 1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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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6m
히 11:17-19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자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구약 창세기는 모두 몇 장으로 되어 있습니까? 50장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1-11장까지는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이 그 내용입니다. 12-50장까지는 네 명의 족장에 관한 얘깁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그들입니다. 그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 야곱은 147세, 요셉은 110세까지 살았습니다. 이삭이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의 족장을 다루는 창세기를 보면 지면 안배가 이상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14장으로 가장 많이 할애되었습니다. 야곱과 요셉에게는 12장씩 할애를 했습니다. 이삭에게는 1장입니다. 창세기 26장이 그 부분입니다. 가장 오래 살았는데, 그의 생애는 한 장으로 끝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을 얘기하며 이삭을 언급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순수한 이삭 얘기는 창세기 26장 한 장뿐입니다. 왜냐면 다른 족장들에 비해 생애가 평범하고 평탄해서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히브리 민족의 원조이자, 하나님 신앙의 대들보 같은 존재였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자기의 새 이름을 히브리 민족이 국호로 삼을 만큼 존재감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의 뼈대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기여한 인물입니다. 그에 비하면 이삭은 그 생애가 평범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언제나 평범한 데 있습니다.
이삭의 생애를 청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눠 생각해 보겠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아브라함의 시험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합니다. 100세에 얻은 천금 같은 자식인데,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이 때가 주전 약 2050년 경이고, 이삭의 나이 15-16세 되던 때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을 대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이 정말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정작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저항이나 불평도 없이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모리아산을 향해 출발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아브라함이 자기 생명과도 같은 아들을 잡아 바치려고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항상 ‘아브라함도 과연 사람일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잡아 바치겠다고 길을 떠나고 있을까라는 겁니다.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산에 당도한 후, 두 종을 남겨두고 이삭과 함께 산을 오릅니다.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들고, 아들 이삭은 나무를 졌습니다. 아들이 묻습니다.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순간 아브라함의 가슴이 얼마나 무너졌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태연한 척하며 아들아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는 그런 얘기가 없습니다만, 아마 마지막 순간에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이 자기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얘기했을 겁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삭이 울며불며 난리를 피웠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당시 아브라함 나이 115세나 되었습니다. 얼마든지 아버지를 밀치고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다 자란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순히 자기 목을 내밀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우리 같으면 그렇게 순순히 죽어주겠습니까? 두 눈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나를 잡아 피를 뽑고 각을 떠서 태워 바치겠다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동화 같은 얘깁니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부자가 끌어안고 실컷 울었겠지요. 운명의 시간은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꽁꽁 묶어 제단에 눕혔습니다. 칼을 뽑아 내리치려고 하자, 하나님이 긴박하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칼을 대지 말라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나를 참으로 경외하는 줄 알겠노라 네 아들 대신 뿔이 수풀에 걸린 양을 잡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얘기하는데, 이삭의 순종도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10대인 이삭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럼에도 아들은 아버지가 노망났다고 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순종의 극치입니다. 본문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았다”(19절)고 합니다.
여러분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족장 가운데서 주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을 한 사람 꼽는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이삭입니다. 이삭이야말로 주님의 모형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친히 지고 골고다에 올라 유월절 희생 양으로 나무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이삭도 자기를 불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에 올라가 꽁꽁 묶인 채 번제단에 바쳐졌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던 주님의 그 처절한 순종과 자기를 잡겠다는데도 아버지께 순종한 이삭이 얼마나 유사합니까. 주님이 죽음의 쓴 잔을 마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과 사흘 길을 걸려 모리아산에 가서 되살아난 이삭이 얼마나 비슷합니까. 확실히 이삭은 주님의 모형이었습니다. 모두가 제 마음대로, 제 소견대로,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시대여서 그럴까요. 오늘 본문의 이삭의 순종, 말도 안 되는 이삭의 복종이 너무도 위대하고 숭고해 보입니다.
다음은 이삭의 장년기입니다. 창세기 24장 6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이삭은 야곱처럼 밤을 새워가며 처절하게 하나님과 씨름한 적은 없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색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날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기도했던 겁니다. 이때는 아마 자기의 결혼문제를 두고 기도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그의 나이 40세에 리브가를 만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임의대로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립니다. 그러다 마침내 현숙한 리브가를 만난 겁니다. 이삭은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창세기 25장 21절입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이때는 이삭의 나이 60세가 되던 때입니다.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습니다. 창세기 25장 12절 이하를 보면 그의 이복형제인 이스마엘은 이때 아들만 열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처럼 그도 그랬던 겁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다른 인간적인 방법을 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결혼한 지 20년이 아니라 10년도 못 참고 여종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0년을 참고 기도하며 기다리다 드디어 응답을 받습니다. 절대 그가 생각한 대로 자기 판단대로 처신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린 겁니다. 이게 바로 이삭의 신앙, 경건, 영성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반드시 저물 때 들에 나가 기도하던 이삭처럼 우리만의 호젓한 기도의 골방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입니다. 기도의 계절이 온 겁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바쁠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루터는 가장 바쁘고 분주할 때 자기 일기장에 ‘몹시 바쁘다. 더욱 기도해야겠다’고 적었습니다. 이 가을에 이삭의 기도생활을 배웁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건강하고 경건해집니다. 그래야 리브가처럼 현숙한 아내도 얻고 이삭처럼 경건한 남편도 만납니다. 또 60세든 100세든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식도 얻습니다.
다음은 이삭의 노년기입니다. 이삭에게도 특기가 있었습니다. 우물파기였습니다. 그는 우물파기의 달인이었습니다. 중동은 그 일대가 물이 귀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일생에 하나도 파기 어려운 우물을 이삭은 무려 일곱 번이나 팠습니다. 그가 위치를 정하고 파면 반드시 거기서 생수가 솟았습니다. 이삭이 이렇게 여러 차례 우물을 판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가나안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삭을 그랄 땅으로 인도하셨는데, 그곳은 블레셋 영토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이삭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100배의 수확을 얻어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26장 13절 이하를 보면, 창대하고, 왕성하고,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들이 심히 많아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땅의 주인인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해서 이삭이 판 우물을 메우고 말았습니다. 외지사람이 들어와서 잘 되는 것 보기 싫으니 당장 떠나라고 했습니다. 하는 수없이 이삭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딴 곳으로 이주합니다. 거기서도 우물을 팠는데 생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거기서도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서 우물을 또 빼앗깁니다. 이삭이 또다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무려 일곱 번입니다. 물론 이삭이 힘이 없어 일방적으로 당한 게 아닙니다. 창세기 26장 16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도 이삭이 더 강성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그들과 시시비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농사도 잘되고, 우물도 파는 곳마다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그야말로 온유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점에서도 그는 주님과 많이 닮았습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지고 배우라고 했습니다. 이삭의 온유함 앞에서 아비멜렉도 탄복을 금치 못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 발로 걸어와 화해를 청합니다. 창세기 26장 2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이방인들이 제 발로 이삭을 찾아와서 한 말입니다. 이삭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30-31절입니다. “[30]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이삭은 이렇게 악을 선으로 이긴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이삭을 못살게 굴었던 사람, 이삭의 우물을 메웠던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와 이삭의 경건한 신앙인격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가 잘못했다 너야말로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다. 더는 못살게 굴지 않겠다고 하자 성대하게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삭은 항상 악을 선으로 이겼습니다. 악을 악으로가 아니라 선으로 갚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6장 2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르호봇은 넓은 땅, 넓은 장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우리가 이 넓은 땅에서 번성하리라고 합니다. 주님이 산상보훈 8복에서도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온유한 자가 르호봇을 얻습니다. 이삭처럼 거부가 되고, 번성하고 강성하기를 원합니까? 르호봇을 얻고자 하십니까? 온유하십시오. 관대하십시오. 모든 사람과 화해하고 화친하십시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눈에 불을 켜고 호전적으로 살아야 큰 땅을 차지할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넓은 땅 르호봇은 이삭처럼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영웅들, 그 숱한 침략자들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르호봇은 고사하고 한 평 땅도 차지하지 못한 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온유하셨던 주님은 지금도 땅끝까지 번성하십니다. 이삭은 평화를 사랑했기에 넓은 땅을 차지했고, 강성했고, 장수했습니다. 이삭의 삶이 정말 아름답고 복되고 풍성하지 않습니까? 부디 여러분도 주님을 닮고 이삭을 닮아 온유하고 관대하십시오. 늘 평화를 사랑하시고 이웃과 화해하십시오. 올해 우리 교단 제100회 총회가 <화해>입니다. <주여, 우리로 화해하게 하소서>입니다. 이삭처럼 더욱 너그럽고 관대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화해해서 이삭이 누렸던 넓은 땅 르호봇의 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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