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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9m 화해를 위하여(창 45:1-8)

20150809m

창 45:1-8

화해를 위하여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우리는 올해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분단 70년은 광복 70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광복은 잃었던 빛을 되찾았다는 뜻인데,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다시 분단이 되고 6.25를 치르고, 오늘까지도 여전히 분단이 계속되고 있는 마당에 광복은 무슨 광복입니까. 일제로부터 빛을 되찾자마자 다시 분단이 되면서 그 빛을 잃었습니다. 분단된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비로소 우리 민족에게는 광복입니다. 그게 잃었던 빛을 되찾는 진정한 의미의 광복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과 관련해서 우리가 롤 모델로 삼아야 할 성경의 인물을 요셉이라고 봅니다. 본문은 기가 막히는 대목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했던 형제들, 외국 상인에게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을 13년 만에 극적으로 만나 화해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기를 죽이려했고 외국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끝까지 형제의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그를 가장 사랑하고 편애한다는 이유로 다른 형제들로부터 철저히 배제당하다가,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깊은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그러자 큰 형이 불쌍하다고 끌어올려 외국 상인에게 노예로 팝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짐승에게 희생당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그런 자기의 형제들을 증오하거나 원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절 이하를 보면,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자 그 정을 잊지 못해 방성대곡했다고 합니다. 이집트라는 천하대국의 총리가 그 총리공관이 떠나가도록 울었다는 것입니다. 형들을 만나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기본적으로 이게 꼭 필요합니다. 형제의식의 회복 말입니다. 북녘 사람들은 남이 아닙니다.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서로 너무 미워하고 저주하고 증오하며 살아왔습니다. 철저하게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맞서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겁니다. 자기를 배신하고 버리고 죽이려고 한 형제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게 복음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런 형제애로 뼈아픈 과거의 상처를 털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우리도 북녘의 동포를 향해 형제애를 발동해야 합니다. 서로 헤어져 산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혈육의식으로 거리를 좁히고 화해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기서 분단을 더 고착화하고 더 적대하면 한 핏줄이었던 남북이 완전히 이질화되어 남보다 더 멀고 낯선 사이가 되고 맙니다. 더 늦기 전에 화해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광복을 맞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섭리신앙을 발동했습니다. 요셉이 배신한 형제를 만나 방성대곡하며 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기 생애를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신의 아픈 과거사를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치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경륜으로 이해하고 해석했기에, 자기를 버린 형들에게 관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그 깊은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고, 아무리 형제라 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치명적인 배신이었습니다. 요셉이 잘못한 게 없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다른 형제보다 자기를 더 사랑했다는 이유 외에 요셉이 형제들에게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형들이 그 어린 동생을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그것을 단지 인간적인 비극으로만 보지 않고,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실제 요셉이 얼마나 이러한 섭리 신앙에 투철했는지는 5절 말씀에 나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8절도 보십시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게 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서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는 형들에게 한 요셉의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형들을 위로합니다.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소서.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에게도 요셉과 같은 섭리신앙이 필요합니다. 누가 뭐래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인간이 제 멋대로 현실을 주무르고 역사를 요리하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사 그 어떤 사건도 하나님의 간섭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았다면, 애굽에 팔려가지 않았다면, 애굽에서 억울하게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억울하게 옥살이 할 때 감옥에서 애굽 정부의 고위관료를 만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은 그 관료의 꿈을 해몽합니다. 그 관료가 석방되고 복직이 되었는데, 마침 바로가 꿈을 꿉니다. 그 꿈이 난해해서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온 나라의 박사들과 술사들을 불렀는데도 해몽이 안 됩니다. 그때 감옥에서 나온 관료가 요셉을 떠올립니다. 감옥에 있는 히브리 노예 중 요셉이란 사람이 꿈 해석을 잘 한다고 보고합니다. 요셉이 바로 앞에 가서 거침없이 해몽합니다. 앞으로 애굽에 7년간 풍년이 들고, 7년간 흉년이 찾아듭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꿈 해석에서 그치지 않고 처방까지 내립니다. 그러자 바로가 그 일을 네가 하라고 하며 총리로 삼습니다. 나이 30에 감옥에 갇혀 있던 히브리 노예가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역사에 이런 반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회고를 한 겁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라고 말입니다. 형들에게 인신매매 당한 것,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생활한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겁니다. 


요셉은 원래 어릴 때부터 꿈을 많이 꿔 별명이 꿈쟁이었습니다. 그의 꿈 가운데는 자기 형들의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 형들의 곡식단이 자기 곡식단에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철이 없어 그런 꿈 얘기를 다 말하는 바람에 형들의 미움을 사서 결국 애굽에 노예로 팔리는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어릴 때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분단과 6.25는 그 책임 당사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사 배후에도 분명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요셉의 섭리사관을 배웁시다. 요셉의 이 대범하고 대승적인 섭리신앙을 배웁시다. 요셉의 감동적인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형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더 큰 구원과 밝은 미래를 위해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먼저 보내신 겁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안심하소서. 오늘을 위해, 우리의 가족을 위해 하나님이 지난 모든 시간을 섭리하신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 그대로 우리 삶에 어떤 것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의 아픔, 절망도 우리의 광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해석하십시오. 요셉은 적어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 순간 순간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요셉은 감옥생활이 얼마나 절망스럽고 고생스러웠으면, ‘내 혼이 쇠고랑에 채워졌다’고 합니다. 


다음은 섬김의 정신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마찬가집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져주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둘 사이는 좁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사이도 원수지간에서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 누가 강자입니까? 요셉입니까? 형들입니까? 요셉은 당시 유일한 초강대국 이집트의 총리대신입니다. 형들은 양식이 없어 이집트로 구걸하러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얻은 복을 형들에게 원수 갚는 것에 쓰지 않았습니다. 10절 이하입니다.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원래 화해는 이런 겁니다. 강자가 먼저 양보하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강자가 먼저 약자의 발을 씻겨야 합니다. 약자는 자존심이 전부이기에 스스로 먼저 숙이고 들어가기 힘듭니다. 이집트 총리 요셉이 먼저 형들을 끌어안았던 것처럼 조금이라도 잘 사는 쪽이 약한 쪽을 섬겨야 합니다. 이런 게 성서적입니다. 그런 섬김과 양보가 없는 한, 화해도 통일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14-15절입니다.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요셉이 먼저 그들을 끌어안고 입맞추며 울자 그때서야 형들도 울며 요셉과 말합니다. 강자가 먼저 끌어안아야 합니다. 강자가 먼저 달려가서 입을 맞추어야 하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사는 우리가 먼저 북한의 형제를 포용하고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좀 더 과감하게 북한 동포를 끌어안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상호주의 원칙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상호주의는 현상유지 원칙입니다. 이는 이, 눈은 눈 같은 원칙입니다. 이런 모습으로는 절대 화해와 통일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봉양하고, 섬기며, 모든 가족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요셉의 이러한 섬김과 희생의 정신이 이 시대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화해의 길이 열리고 통일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었던 독일의 경우를 보십시오.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잘 사는 서독이 못 사는 동독을 늘 돕고 지속적으로 섬겼습니다. 정말 드러내지 않고 생색내지 않고 실리적으로 도왔습니다. 


부디 요셉을 우리의 화해와 통일의 훌륭한 모델이요 멘토로 삼읍시다. 그래서 그의 형제사랑과 심오한 섭리신앙과 희생과 섭리 정신을 배우고 본받읍시다. 그래야 우리도 화해를 이루어 진정으로 빛을 회복하는 통일을 이룰 줄 믿습니다. 



원문 자료와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