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26m 성숙을 위하여(엡 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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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6m
엡 3:14-19
성숙을 위하여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복음서를 보면 주님은 언제 쉬셨을까 싶습니다. 새벽에 기도하시고 밤에도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십시오. 정말 바울은 대단합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주님을 많이 닮았습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은 죄인들과 식사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바울은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는 더 많은 시간, 열정, 관심과 애정을 오직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바쳤습니다.
본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14-15절입니다.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바울은 지금 어디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3장 1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즘 우리의 기도는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데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를 보십시오. 물질적인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택한 것도 본격적인 여름인 8월을 앞두고 이제는 우리도 열매를 생각하자는 취지입니다. 햇볕을 잘 받아야 낟알이 잘 익듯이,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여름에는 휴가철이다 보니 자칫하면 나태하기 쉬운데 이때 우리가 잘 훈련해야 가을에 수확할 게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는 우선 속사람의 강건을 위해 기도합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사람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속사람과 겉사람을 구분합니다. 겉사람은 육신이고 속사람은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짓고, 거기에 생기인 루아흐를 불어넣습니다. 다른 피조물에는 루아흐를 불어넣지 않았습니다. 인간만 루아흐가 있습니다. 우리는 겉사람만 관리하는데, 속사람도 관리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의 속사람의 강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사람의 실체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 말씀이 정확합니다. 겉사람은 나이가 들면 낡아집니다. 어차피 소모품입니다. 겉사람인 육신은 제아무리 닭고 조이고 기름 친다 해도 이것은 시한부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리를 하지 않으면 병들지만, 관리를 잘해주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날로 속사람은 투명해집니다. 우리의 영혼이 맑아집니다. 우리 믿는 자의 소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왜 속사람을 늘 관리해서 우리의 영혼이 강건해져야 할까요? 왜 우리의 속사람이 튼튼해져야 할까요?
특히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으면 결코 감당키 어려운 시험과 환난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 어느 때가 더 살기 편했습니까? 예수 믿기 전이 훨씬 좋았습니다. 더 편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어 보십시오. 1주일에 딱 한 번 쉬는 주일 아침에 일찍부터 일어나 부산 떨 필요가 없습니다. 주일성수한다고 등산도 낚시도 골프도 다 포기하고 오직 교회에 나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주일날 안 나오면 월요일 새벽기도에 나와 벌충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안 하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신앙생활하면 피곤한 게 많습니다. 믿는 사람은 조용히 앉아 TV 한 번 볼 시간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더 치명적인 헌금도 있습니다. 헌금도 종류가 많습니다. 십일조는 참으로 끔찍한 수치입니다. 절기헌금도 1년에 몇 차례나 해야 합니다. 각종 특별헌금도 있습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은 절대 아무나 못합니다. 이것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은 맨 정신으로는 못합니다.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 안 믿을 때는 멀쩡했는데 예수를 믿자 괜히 어긋나고 탈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어떤 분이 저를 찾아와 ‘목사님, 저는 믿는데도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릴까요?’ 하면서 항의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다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드디어 사탄이 나의 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편일 때는 가만히 두었는데 내가 주님 편이 되자 사사건건 못살게 굽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꼭 강건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부실하면 이런 시험에 날마다 넘어집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 버릴 수도 없고 따라가자니 죽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속사람이 강건하면 시험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썩은 나무는 태풍이 오면 넘어지지만, 튼튼한 나무는 태풍이 오면 더 뿌리를 든든히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겉사람보다 속사람이 강건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 기도하며 제일 먼저 속사람이 제발 건강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마음 가운데 계시기를 빌었습니다. 17절 상반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베소교회 교인들은 이미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도합니까? 이미 주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아직 주님이 안 계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아직 그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까? 수 년 수 십 년 신앙생활 해왔는데,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계서 계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흔히 우리는 이 말씀을 전도용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전도용이 아니라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입니다. 주님이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22). 주님을 밖에 세워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까? 라오디게아 성도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요한계시록 3장 15절 이하입니다.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내 안에 들어와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주님이 그 사람 마음 가운데 계시면 절대 미지근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마음에 품고 사는데 어떻게 미지근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겁니다. 신자의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환난과 고통, 슬픔을 이길 힘이 없다는 겁니다. 신앙이 내 현실에 대해 발언권이 없고 구속력이 없는 겁니다. 신앙이 무용지물입니다. 내 신앙이 세상에 대해 너무도 무력한 겁니다. 그런 신앙을 왜 가집니까? 현실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신앙은 내 안에 주님을 모시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 안에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까? 저는 언제나 문을 열어놨습니다. 주님이 안 들어오신 것이지 제가 문을 안 열어둔 게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선교단체에서는 작은 전도책자 하나를 읽어주고 무조건 자기가 읽어주는 기도를 따라하라고 합니다. ‘주님 이제 내 마음에 들어오십시오.’ 긴가민가하다고 말하면, 이젠 윽박지릅니다. ‘들어오신 줄 믿으세요.’ 주님이 내 안에 오신 것은 기계적인 게 아닙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내 마음 문을 열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들어오신 줄 믿습니다. 아멘. 이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본문은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신 일이 순서상, 성령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 다음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감당할 수 있을 때 구체적으로 임하십니다.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주님이 밀치고 들어오셔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항상 확인사살을 하십니다. 기도응답도 우리가 기도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겪는 어려움은 기도하고 나서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왜 확신이 안 생길까요? 금식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철야기도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아직도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모호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그동안 수없이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고, 방법도 아니고, 기도는 관계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이 내 안에 계셔야 비로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응답이 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셔야 내 기도에 메아리가 있고 응답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합니다. 17절 하반절 이하입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교회에서 늘 강조하는 사랑이 비로소 여기에 등장합니다. 여기가 어느 지점입니까? 성령으로 내 속사람이 강건해져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야 비ㅣ로서 내가 사랑 가운데 뿌리를 내리게 되고 내 믿음으 터가 굳어집니다. 기도도 그렇지만 사랑도 절대 거저 되지 않고, 주님이 내 안에 오셔야 가능합니다. 그 전에는 아무리 사랑타령을 해도 안 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 고린도후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해서 꼼짝없이 나로 하여금 사랑하며 살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강권해서 하는 사랑이 성경이 말씀하는 아가페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것을 현실성은 없고 성경에 나오는 주옥같은 말씀쯤으로 치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압도하시면, 나도 주님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원래 우리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어도 곱게 죽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죽어 마땅한 하나님의 철천지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 대신 그렇게 죽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의 그 사랑의 너비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은 자에게는 추상적인 말로 들리지만, 정말 주님을 모신 자들에게는 가능한 현실입니다. 주님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심령에 계시므로 그들이 주님처럼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며 살게 해달라는 바울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 나도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비로소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속사람의 강건, 그리스도의 내주, 사랑의 뿌리 내림이 본문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입니다. 그래야 올해도 주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를 우리가 수확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기도한 바울의 간구가 헛되지 않아서 우리 푸른교회 성도들의 믿음도 여름 동안 뜨거운 볕에 성숙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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