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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5m 원초적 감사(살후 2:13-17)

20150705m

살후 2:13-17

원초적 감사


[13]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절 상반절을 다시 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본문은 데살로니가후서인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를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실성이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또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맥추감사절이고 가을에는 추수감사절이 있습니다. 1년에 한두 번 감사절 때 감사하라는 것은 수긍이 되는데, 어떻게 날마다 사건마다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올 상반기를 회고해 보십시오. 만사형통하고 매 순간 삶이 즐거우셨습니까? 오히려 우울하고 슬프고 불쾌하고 짜증나는 일이 훨씬 많지 않았습니까? 배신감 때문에 힘들어 하고 끙끙거리며 고통스러워했던 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바울의 이상주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얼마든지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다고 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 옳다고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믿는 사람들이라면 말입니다. 어째서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마땅합니까? 


13절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택해주셨기에 1년에 한두 번 감사하면 될 게 아니라 1년 365일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내가 남보다 더 낫고 더 착하고 더 잘나고 더 주님을 사랑하고 더 믿어서, 더 헌금하고 기도해서 주님이 나를 택하신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처음>은 태초, 아니 태초 이전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바울은 이게 바로 우리의 원초적 감사의 근거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은 절대 나와 하나님의 합작품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의 공동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99.9%를 투자하고 내가 0.1%를 투자한 주식회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행하신 하나님 고유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오직 감사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잊어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잊지 않으면 얼마든지 늘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가뭄 탓에 보리수확이 변변치 못하고, 메르스 때문에 올해 사정이 더 나빠졌다고 해도 우리에겐 선택이라는 원초적 감사의 근거가 있기에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조건 없이 처음부터 선택해 주셨다는 것을 알면 살면서 상대적인 어려움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초적인 감사목록 제1호인 <선택>을 기억하시며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의 영광을 바칩시다.


13절 하반절입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이 때문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선택해 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를 부단히 관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관리자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수호천사도 보내십니다. 수호천사는 동화에 나오는 얘기가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얘깁니다. 우리가 성령과 교감하지 못하기에 성령이 역사하셔도 우리의 악한 의지가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기에 삐걱거립니다. 그래서 성령이 늘 근심하시지만, 아무튼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교리적으로 <성화>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의 최대과제는 오직 <성화>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닮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최대과제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천국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이 거룩하고, 24장로가 거룩하고, 천사들이 거룩하고, 보좌 주변의 네 생물이 거룩합니다. 천사들의 찬송의 내용이 거룩하다 입니다. 앞서 간 성도들이 천국에서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서 거룩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문화적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더는 아픔도 슬픔도 눈물도 죽음도 밤도 없습니다. 천국은 좋은 곳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을 믿지만 만의 하나라도 천국에 못 가고 지옥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본능적 애착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내가 아직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천국에는 가겠지만, 당장 오늘 죽어 주님을 뵐 자신은 없다는 겁니다. 이걸 달리 표현하면 내가 아직 성화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도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를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빨리 안 데려가시고 최대한 이 땅에 두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더 성화되라는 것입니다. 성화가 많이 된 모습으로 천국 가면 천국에서 누릴 상급이 더 큽니다.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최대한 성화할 수 있도록 말미를 주신 겁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넉넉잡아도 1달이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간 뺑뺑이 돌린 것도 430년간 종살이한 때를 벗으라는 의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광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거룩해진 모습으로 거룩한 나라 천국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창세 전에 이루어진 우리의 선택과 구원은 그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화는 다릅니다. 성화는 그 주체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영성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주일을 지키고, 헌금하고, 주님 몸 된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이유는 성화 때문입니다. 성화는 순수 내 몫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내가 주체인 성화마저도 성령의 역사와 돌보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성령이 오늘 강림하셨습니다. 맥추절, 오순절에 강림하셨습니다.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절기라고 해서 오순절이라 부릅니다. 오순절이 맥추절입니다. 이 날에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성령시대의 장을 열었습니다. 왜 성령이 맥추절에 강림하셨습니까? 맥추절과 성령강림은 무슨 함수관계가 있을까요? 맥추절은 초실절입니다. 보리가 그해 밭농사의 초실이기에 그렇습니다. 맏물입니다. 그래서 맥추절을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초실절이라고도 합니다. 2000년 기독교사의 맏물이 성령강림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이 교회의 기원입니다. 기독교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 사건은 맥추절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성령강림 사건이 오순절, 맥추절에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맥추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성화를 돕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항상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위로와 소망입니다. 16절 하반절입니다.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2015년도 이미 반을 살았습니다. 상반기 6개월은 힘들고 고달팠습니다.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위로와 소망 덕분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위로하시고, 기도할 때마다 소망의 비전을 보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소망, 위로는 사실상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는 마치 마약과도 같습니다. 세상이 주는 소망은 마치 로또와 같습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고 좇다가는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위로와 소망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한 힘이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위기에 내몰리며, 절망감과 좌절감에 휘둘립니까? 우리는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지난 반 년도 얼마나 많이 속으로 울었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위로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해 옳다는 것입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입니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모세가 깨달은 것은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입니다. 따라서 인생은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만 그 인생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속이고 배신하고 실망케 만들지만,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고 소망을 갖게 하시며, 포기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원초적인 이 세 가지만으로도 늘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를 깨우치는 이 원초적 감사의 이유를 마음에 품고 삽시다. 그래서 순간순간 짜증이나 원망, 비관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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