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14m 종말론적 신앙(마 10:21-23, 눅 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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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4m
마 10:21-23, 눅 9:26-27
종말론적 신앙
(마 10:21-23, 개정)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눅 9:26-27, 개정)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본문은 종말에 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은 박해를 받으면 다른 동네로 피신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로 피신하기 전에 다시 온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도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재림이 급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이는 말씀을 어떻게 보십니까?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주님이 거처를 예비하러 갔다가 다시 와서 거기로 데려가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몇 년 내에 주님의 재림이 이뤄질 것처럼 보이는 구절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주님이 종말을 실제로 긴박하게 믿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종말론적 착각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슈바이처의 견해에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슈바이처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학을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다녔습니다. 그는 먼저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의학박사 학위는 아프리카 선교를 결심하고 받았습니다. 목사안수도 받았습니다. 그는 파이프 오르간 설계자면서 제작자였고, 바흐 음악의 대가였습니다. 1952년에는 노벨 평화상도 받습니다. 재주가 많은 분이고 큰 업적을 다방면에서 세운 분입니다.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그가 이룬 성서신학자로서의 성과물입니다. 우리에겐 아프리카 선교사의 업적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는 신약성서학자로 현대신학사에 남긴 공헌이 큽니다. 1906년에 펴낸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구.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19세기 신약성서신학을 집대성한 겁니다. 이 책에서 그는 주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철저히 종말론적이었다고 합니다. 종말이란 개념이 주님의 생애 및 선포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란 겁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서의 종말은 대단히 긴박한 종말이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입장의 근거구절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첫 일성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믿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나도록 종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주님이 착각하셨다는 겁니다. 급박하게 임할 종말로 오해했다는 겁니다. 슈바이처는 주님의 산상보훈도 철저히 종말론적으로 오리엔테이션된 윤리라고 합니다. 실제 산상보훈은 주옥같은 주님의 윤리적 교훈입니다. 그러나 이게 정말 실천 가능한 윤리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산상보훈을 너무 이상적이어서 실천 가능하지는 않지만, 주님이 윤리의 정수를 제시하고, 그 이상을 향해 부단히 매진하라고 주셨다고 얼버무립니다. 오른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라,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라고 합니다. 이게 일반윤리가 아니라 중간윤리라고 하면 쉽습니다. 올 연말에 주님이 오신다는데, 산상보훈에 따라 살지 않겠습니까? 슈바이처는 산상보훈이 중간윤리라고 했습니다. 내일모레 오신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런 비상한 종말론적 윤리를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슈바이처의 종말론을 철저적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종말이란 개념이 예수님의 모든 선포, 전 생애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연구에 공감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칼 바르트를 꼽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철저한 종말론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바르트 이후 세계 신학을 희망의 신학이라 부릅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입니다. 그의 신학도 종말론의 신학입니다.
주님의 사역 자체가 종말론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 66권의 결론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마라나타>입니다. 주님이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니까, 요한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했는데, 그 원어가 <마라나타>입니다. 종말론이 66권 성경의 결론입니다. 이렇게 보면 슈바이처의 종말론은 옳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종말론의 아쉬운 점은 주님이 종말을 긴박한 종말로 착각했다고 본 것입니다.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주님이 슈바이처가 말하듯 종말을 착각하신 겁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슈바이처가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이 착각하셨을 리 없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이 긴박한 종말로 말씀하셨을까요?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비밀은 마태복음 24장 35절 이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 종말의 함정은 누구도 그 때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천사도 모른다고 했고, 도둑처럼 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말은 마치 올 연말에 임할 듯이, 2-3년 내에 임할 듯이 늘 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 2천년 뒤에 오신다고 하면 우리 가운데 누가 종말을 의식하며 살까요? 요즘 우리가 사는 모습은 무방비로 살아갑니다. 종말에 대한 내성, 타성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금방 임한다는 종말이 지난 2000년 동안 임하지 않았고, 지금 당장 임할 것 같지도 아니니까 다 무장을 해제 하고 깊은 잠에 빠진 겁니다. 이제는 누구에서도 종말론적 긴장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게 문제요 위기입니다. 종말은 도적처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건입니다. 누구나 5분 대기조로 살아야 함에도 이제는 비상한 모습을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물론 종말이 1000년 뒤에 임할 수도 있지만, 내일 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졸지에 종말을 당하지 않도록 예비해야 합니다. 주님이 긴박한 종말을 말씀하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당장 닥칠 듯한 위기의식을 갖고 살라는 겁니다. 그래야 타락하지 않고, 긴장을 풀지 않고 깨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절대 주님이 종말을 착각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아들도 종말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종말이 비밀에 부쳐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종말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당장에 닥칠 듯이 말씀하신 것은 누구나 종말을 예비하며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올 연말에 주님이 오신다고 하면 얼마든지 우리는 산상보훈처럼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을 회복합시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주님이 당장에 오신다고 믿고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명령을 수행하며 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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